비 내리는 날
비가 내린다. 창밖으로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우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에 젖은 길을 무념의 마음으로 걷는다.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귓속으로 또르륵 또르륵 스민다. 마음속에 점찍어두었던 근처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갖가지 화분이 즐비하고, 생화와 비누꽃으로 만든 예쁜 플라워 박스로 꾸며진 카페로 들어선 순간 두 눈이 행복했다. 최근에 생긴 이 가게는 꽃집과 카페를 겸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 번거로움 없이, 문득 들릴 수 있는 예쁜 장소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나는 창가를 마주한 자리에 앉아 국화차를 주문했다. 언젠가 지인 사무실에서 마셨던 국화차 생각이 난다. 그날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았는데 따뜻한 국화차를 마시자 속이 편안해지면서 몸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국화차를 좋아했다.
주문한 차가 나왔다. 투명한 유리로 된 작은 찻잔이 맑은 수정 빛을 머금었다. 깨끗한 모습이 참 예쁘다. 빈 찻잔에 찻물을 천천히 따랐다. 노란 국화 빛 차 빛깔이 곱다. 찻물을 담은 찻잔은 빈 잔이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찻잔을 손에 들고 한 모금을 마신다.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 몸 안에 퍼진다. 또 한 모금 마신다. 찻잔에 찻물이 반쯤 남았다. 반을 채우고 있는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역시 좋다.
이 찻잔에 아메리카노 커피나 혹은 에스프레소를 섞으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맛이 없겠지, 아니 독특한 맛이 될지도 몰라. 맛이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국화차에 전혀 안 어울리는 커피 종류를 섞었다 해서 큰일 날 일은 아니다. 만일 이 찻잔에 먹물이라든가, 음용 불가능한 물을 담았다 해도 큰일은 나지 않는다. 그것을 버리고 찻잔을 씻어 다시 국화차를 따르면 되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세상 이치도 그렇다.
나는 반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찻잔이 비워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찻잔은 비어있어도, 가득 차도, 반반 차도 좋다. 어떤 상태여도 괜찮다. 비면 빈대로, 차면 찬대로, 덜 차면 덜 찬대로 좋다. 다만 내 찻잔에 어떤 차를 담을 것인가, 가득 채울 것인가, 비워낼 것인가, 반만 차도 만족할 것인가, 또는 비우고 채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알고만 있다면 말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쳤다. 비가 내릴 때도 좋았고 그쳐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