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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미소 Sep 15. 2021

고마운 선생님


국어책, 산수책, 받아쓰기 공책, 그 위에 필통.

나는 몇 번이나 책과 공책, 필통을 가지런히 챙겼다.

가끔 열어놓은 문밖을 흘낏 거리기도 하고 목을 늘이며 기다리는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마을 앞으로 길게 뻗은 둑 오른쪽 끝에서부터 선생님의 자전거가 천천히 마을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나는 엉덩이를 빼고 몸을 늘이며 선생님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내다보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이 시간이었던가!

 초등학교 1학년 봄방학을 하던 날, 하교 길에 심하게 열이 오르고 온 몸이 노곤했다. 집으로 오던 길에 나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마을 앞 모래사장 나무그늘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 밤늦게 나를 찾은 부모님은 다음날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고 의사는 나에게 골수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왼쪽 다리뼈에 염증이 생겨 이대로 두면 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조금 더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은 받은 나는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집에서 학교를 가려면 다리도 없는 긴 강을 건너야 했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은 날마다 학교를 데려다 줄 수 없었고, 나 또한 오랫동안 의지에 앉아있을 수도 없었으므로 집에서 요양을 해야만 했다. 2학년 책을 받고도 학교에 가지 못해 속상해 하는 나의 마음을 엄마는 어느 날 가정방문을 오신 선생님께 이야기하셨다. 그날부터 선생님은 일주일에 두 번씩 우리 집으로 오셔서 직접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셨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선생님을 확인하자 나는 얼른 방문을 닫았다. 항상 선생님을 만날 때면 반가움보다 먼저 부끄럼이 마중을 하는 탓이다. 다시 한 번 책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소곳이 앉아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삐걱 거리는 귀에 익은 자전거 소리가 들렸다.


 "영인이 있니?"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상기된 얼굴로 머뭇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잘 있었어. 우리 영인이?"


 나는 웃는 얼굴의 선생님이 '우리 영인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이 참 좋았다. 나를 부르는 선생님의 웃는 표정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껴기 때문이다.

낡은 가방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선생님 앞에 엉거주춤 나도 함께 앉았다.


 "숙제는 다 했니?"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가지런히 챙겨놓았던 책과 공책을 조심스럽게 내 밀었다.


 "아이쿠! 우리 영인이 다했네? 어디 한 번 선생님이 맞게 했나 볼까?"


 선생님은 내가 한 숙제를 찬찬히 살펴보셨다. 동그라미가 하나하나 더해 갈 수록 나는 기쁨과 부끄러움에 배시시 웃곤 했다.


 "다 맞았네. 우리 영인이. 정말 열심히 했구나! 우리 영인이 천재인 걸?"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말 한마디 한 마디는 모두가 넘치는 칭찬이었고 아픈 몸으로 기죽어있던 마음을 쑥쑥 기쁨으로 자라게 했다. 나는 선생님의 이런 칭찬이 듣고 싶어 몇 번이나 답을 확인하기도 했었다.


 "우리 영인이 이번에는 받아쓰기 한 번 해 볼까?"


 받아쓰기는 자신 있다. 지난번 선생님이 오셨을 때 국어책에 빨간 줄을 쳐준 낱말을 백번도 더 썼을 것이다.더구나 엄마랑 언니를 졸라 몇 번이나 받아쓰기를 했고, 틀린 단어는 또 오십 번도 더 쓴 것 같다.

하지만 틀려서 선생님을 실망시키면 어쩌나 하는 나의 마음은 조마조마 했다. 선생님은 국어책을 펴 들고 문제를 내기 시작하셨다. 나는 또박 또박 선생님께서 불러 주시는 낱말을 적어 갔다. 열 문제 모두 자신 있는 문제였다.

역시나 선생님은 열 문제 모두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 주시며 '참 잘 했다'는 도장을 "꽝" 찍어 주셨다.


 "우리 영인이 진짜 잘 하네. 열심히 했구나. 착하기도 하지!'


 선생님의 칭찬은 너무 기뻤지만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방바닥에 손가락으로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다음 방문 때 까지 해야 할 숙제와 국어책의 중요한 낱말에 빨간 줄을 그어 주셨다. 그리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미소도 잊지 않으셨다. 말 안하셔도 나는 다 안다. 선생님의 그 미소는 '참 잘 했다'는 말씀과 '더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선생님의 방문과 함께 공부하는 날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다. 내 성화에 못이긴 엄마의 등에 업혀 얼마 후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8남매의 막내라 50살이 넘은 엄마가 날마다 나를 업고 다니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공부하는 4교시 내내 엄마는 교실 맨 뒤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셨다. 4교시가 끝나면 다시 나를 업은 엄마는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집에 오곤 하셨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과 행복 뒤에 선생님의 깊은 배려와 엄마의 큰 희생이 있었음을 나이가 들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 엄마의 지치지 않은 희생으로 1학기 마칠 무렵부터는 혼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2학년을 마칠 때 나는 우등상과 함께 선생님의 넘치는 칭찬도 함께 들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께서 해 주셨던 넘치는 칭찬은 자신감을 키워 주었고, 깊은 사랑과 배려는 내 힘겨운 삶의 길목마다 큰 힘이 되어 이겨 낼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나의 어린 시절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해 주시고, 자신감을 부쩍 키워주신 참 고마운 선생님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떠 올려 본다.


 "감사합니다. 그리운 이 호익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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