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원작의 맛

파도가 지나간 자리

바다 사이 등대, M.L.스테드먼, 문학동네

by 이야기술사

※ 본문에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및 소설 <바다 사이 등대>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 포스터.jpg


<파도가 지나간 자리> 라는 제목은 지나치게 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포스터 속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배우의 흐릿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두 남녀 배우가 영화 촬영 도중 실제 커플이 되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인 요소였다. <노예 12년>을 아직 보지 못해 내게는 <엑스맨> 시리즈의 '마그네토'로 남아있는 '마이클 패스벤더', <대니쉬 걸>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연기는 보장되었을 터였다. 덧붙여, 이번 영화의 원작 소설인 <바다 사이 등대>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라는 사실이 선택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영화 제목보다 더 감상적인 <바다 사이 등대> 라는 제목, 서정성을 기반으로 한 세밀한 묘사, 횡으로 나열된 문장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섬의 등대지기와 그의 아내, 아내의 유산 이후 우연히 발견된 아기를 키우게 된 두 사람, 친모의 존재를 알게 된 후의 갈등이라니. 진부한 플롯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장을 채 몇장 넘기지도 않았을 때 이미 나의 편견은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야말로 깊이 있는 문장, 삶을 관통하는 문장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을 두드린 구절을 적어놓지 못했다는 점, 아니 적어놓을 사이도 없이 책에 빠져들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타까웠다. (빛나는 문장들이 궁금하다면 꼭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지난번 <걸 온 더 트레인>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와 플롯의 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비해 다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면, 이번 <바다 사이 등대>는 잔잔하고 서정적인 소설이 얼마나 큰 울림과 감동을 주는지 알게 해주었다. 물론 진부한 스토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작가는 깊이 있는 통찰력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모든 등장인물들과 독자들을 감싸안았다.

영화는 섬과 바다 등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비교적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파르타죄즈 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등대의 상징성과 등대지기의 숙명, 주인공 톰의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내지 못했다. 톰과 이저벨의 첫 만남, 이저벨의 부모가 전쟁에서 아들들을 잃게 된 사연 등은 생략할 수도 있다지만, 전쟁과 등대라는 두가지 소재는 조금 더 깊게 다루었어야 했다. 물론 영상화의 한계일 것이다.

또한 모든 등장인물들을 따뜻하게 감싸안은 작가와는 달리 영화에서 블루이는 소위 배신자로 그려진다.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루시의 친모 해나의 절망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편지와 딸랑이를 보낸 톰. 해나의 아버지가 내건 현상금에 눈이 먼 블루이의 어머니로 인해 목격자로 나서고 이후 후회하는 블루이. 물론 선택은 블루이 자신의 몫이었지만, 영화에서는 그의 내적 갈등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화에서는 여주인공 이저벨이 연이은 유산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도 설명되지 않아, 루시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더 간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루시(원래 이름은 그레이스)의 친모인 해나가 과거 곤경에 처했을 때 톰이 도와주었던 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생략되었다. 그로 인해 이저벨이 남편의 배신에 더 분노하고 의심까지 하게 되어 그를 거의 버릴 뻔했다는 점, 해나 또한 톰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편의 죽음과 잃어버린 딸과의 시간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했다는 점 등 보다 밀도 있는 심리적 갈등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원작 소설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며 안정적으로 전개되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이저벨과 혼자 빈집을 지키는 톰을 찾아온 루시, 아니 루시 그레이스. 영화에서는 그녀가 톰과 이저벨에게 그저 자신을 구해주고 돌봐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소설에서는 "아저씨 목말을 탔던 게 기억나요. (중략) 나머지는 다 뒤죽박죽되어 별로 생각나는 게 없어요. 퍼스로 이사가 새집에서 지낸 것하고 학교 기억이 대부분이에요." - 465쪽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바람과 파도와 바다는 기억하는 그녀지만, 어릴적 그토록 울부짖으며 찾았던 엄마 이저벨과 아빠 톰을 잊고 새로운 환경에서 잘 살아온 루시 그레이스의 밝은 표정이 난 조금은 슬펐다. 마지막 순간까지 딸을 그리워한 이저벨의 절절한 모성애가 떠올라서일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The Girl on the T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