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SF 소설집 / 허블 / 2019. 6월 출간
그때그때 생각나면 찾아오는 비정기적 SF 장르 리뷰 No.9
김초엽 소설가의 작품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에서 처음 읽었다.
솔직히 나는 대상 수상작인 <관내분실>보다
가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더 인상깊게 읽었다.
그런데, 지난해 나온 김초엽 작가의 첫 작품집의 표제작이
바로 그 제목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SF 장르의 단편 7편이 수록되었다.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인 두 편을 제외한
다섯편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었던 것은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이었다.
P.91
그들은 기록된 루이로서의 자의식과 루이로서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경험, 감정, 가치, 희진과의 관계까지도
그렇다면 희진도 그들을 같은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도달했을 때, 희진은 루이가 가까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눈앞에는 회색의 축축한 피부를 가진 여전히 낯선 존재가 서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는 너무 빨리 죽어버리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온전히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완전한 타자
하지만 희진은 이해하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고 싶었다.
루이의 연속성을, 분절되지 않은 루이의 존재를
<스펙트럼> 中에서
태양계 바깥의 행성 탐사를 나섰다가
조난당했던 여성 생물학자 희진은
외계지성체 루이를 만나게 된다.
<스펙트럼>은
첫번째 루이부터, 네번째 루이까지
어떻게 해서 루이들과 희진과의 관계는
분절되지 않고
연속성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스펙트럼> 다음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은
<감정의 물성>이다.
p.205
“글쎄 이해하기 힘든데. 그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는 게 정말로 그 감정을 서유하는 건 아니잖아?”
“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플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 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근데 막상 사면 아까워서 한 번도 안 뿌려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P.213~214
대표님. 저도 이 현상을 이해해보려고 했습니다. 이모셔널 솔리드의 제품들이 미친 듯이 팔려나가는 현상을요. 어떤 점에서는 기분 전환을 위해 술을 마시거나 디저트를 먹는 것과도 비슷하다는 점은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돈으로 행복을 사고 싶어 하는 건 이해가 가요. 그게 실제로 효과적인 행복이 아니더라도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우울’을 사는 겁니까? 왜 ‘증오’와 ‘분노’ 같은 감정이 팔려나가죠? 돈을 주고 그런 걸 사려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어떻게 그들이 부정적이 감정을 사고 싶어 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까?”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감정의 물성> 中에서
<감정의 물성>은 감정을 조형화한 제품이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하,
그리고 '우울'을 계속 모으는 정하의 연인 보현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이 작품집에 수록된 7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공생'일 것이다.
나와 '다른' 수많은 타자와 어떻게 공생하며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한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