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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고따뜻한일상 May 06. 2024

모퉁잇돌

제주 시골에 살아요.

모퉁잇돌
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돌멩이를 좋아한다. 일주일에 한번 하는 출퇴근길에, 막내와 함께 가는 놀이터에서, 오름이나 곶자왈, 알작지 바닷가에 갈 때 발아래를 본다. 오름 정상에서 보는 너른 풍경, 곶자왈의 살아있는 나무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보다 발아래를 보고 돌멩이를 찾는다. 마음에 드는 돌 하나를 주머니에 담으면 별다른 일 없던 하루가, 오름, 곶자왈 그리고 바다가 내 것이 된 기분이 든다. 순간을 오롯이 즐길 줄 모르고 손에 잡히는 내 것 하나를 만들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 나다. 그런 내가 '내 집'에 욕심을 낸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업무량이 많은 디자인 에이전시였다. 아침 여덟시 출근에 새벽 한두 시 귀가가 이어졌다. 야근으로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인턴 삼개월을 거쳐 정직원으로 채용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머물던 고시원에서 나오는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십오분 거리에 있던 여성 전용 고시원이었다. 함께 쓰는 샤워실이 있고, 공용 부엌에선 새벽에 도시락을 쌀 수 있었다. 싱글 침대, 붙박이 옷장, 작은 냉장고가 있던 방에는 정사각형 창이 하나 있었다. 창을 열면 논현동 시장 골목의 잡다한 소리와 냄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창으로 풍경보다 소리가 먼저 들어올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초록과 파랑이 보이는 조용한 창이 필요했다. 주말마다 지하철 이호선 라인을 기준으로 원룸을 알아보러 다녔다. 봉천동에 작은 베란다가 있어 해와 바람이 잘 들고나는 원룸을 찾았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가파른 언덕을 올라 이십 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위치였지만 그래서 조용하고 해가 잘 드는 곳이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월세 계약을 했다.


어릴 적 나는 시엣 아이(시내 사는 아이를 부르는 제주어)였다. 다섯 살부터 아파트에 살았고 결혼 전까지 친정은 제주 시내 중심가 아파트였다.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방학 때마다 중산간 외할머니댁에서 지낸 일이 시골, 단독주택 생활 경험치의 전부였다.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아파트에서 살겠지 생각했다. 쭈욱 그래왔으니까.


직장생활을 시작으로 결혼하면서 지낸 서울에서 십년이 시공간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갖게 했다. 강남 한복판 노출콘크리트 마감에 검은색 프레임 창으로 사방을 두른 회사 건물은 트렌디하면서 쾌적한 환경이었다. 출근한 사무실 공간은 내가 제법 대단한 전문직 어른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지만, 퇴근 후 살던 집들은 창을 열면 바로 닿은 옆 건물의 미운 구석을 보여 주었다. 나도 모르게 한강을 산책할 때 제주 바다를 생각하며 짠내를 맡으려 코를 킁킁거렸고 전셋집을 구할 땐 강박적으로 남향에 창이 많은 집을 찾아다녔다. 햇살과 파란 하늘, 초록 나무는 당연한 게 아니었다. 같은 구, 같은 동에서도 소득과 자산, 직업에 따라 미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나뉘었고 질 또한 차이 났다. 일상에서 자연을 누릴 수 있는 정도가 다르다는 현실은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제주, 시골에  짓기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백퍼센트 자연을 누리고 싶은 마음. 전망 좋은 창을 갖고 싶은 간절한 욕심이 터를 잡고 모퉁잇돌을 놓아 집을 짓게 했다. 이천이십사  오월, 시골살이도  년이 되었다. 양팔 저울의 무게추가 맞춰져서 평형을 이루는 상태처럼. 다른 듯하면서 같은 서울과 제주에서 시간이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세아이와 함께하는 시골 생활이 이제 나에게 맞춤한 옷이 되었다.


지나온 공간과 시간을 바라보고 정리해 보려 한다. 돌아봄은 지금 내 시선에서 각색에 그치리란 걸 알지만. 내 깜냥이 그 정도인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일기가 집을 짓고 밥을 짓고 나와 아이들의 삶을 짓는 일에 모퉁잇돌이 되어 내일을 짓게 할 거라고 혼잣말을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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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elude No. 1 In C Major
("The Well-Tempered Clavier", BWV 846)

Jacques Loussier T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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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꽃이 피는 오월 일기


*덧. 이월부터 쓰기 시작한 매거진 집을 짓다를

차근차근 정리하며 연재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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