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집 설계를 시작했어요.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약간의 포기라고 볼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제품을 갖고 싶어 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에서 선을 긋는 것이다. 또는 어떤 확신을 갖고 레이스가 달린 수건이 아니라 단순하고 질 좋은 무인양품의 수건이 좋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난 그런 능동적인 소비자가 멋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 무인양품의 메시지를 구축한 하라켄야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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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할 때 머릿속에 두었던 메시지이다.
욕심은 버리고 어느 정도 선에서 최선을 찾자.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빼자.
보여주는 집이 아니라 아이들이 편하게 먹고 자고 뛰어놀고 나와 남편이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실용적인 공간 만들기가 목표였으므로 설계에서부터 건축의 장식적인 요소나 고가의 자재, 불필요한 공간은 지양했다.
일층은 주방과 서재, 작업실이 크게 공간을 차지한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하단을 활용해서 작은 건식 화장실을 넣었고 맞은편으로 세탁실이 자리하도록 했다. 세탁실 위 이층에는 화장실을 배치했다.(물을 사용하는 공간을 집의 한쪽으로 다 모아둔 설계다) 화장실과 세탁실 사이 복도 끝 공간엔 손을 씻는 작은 세면대를 놓았다. 일층엔 화장실과 세탁실을 제외하고 문이 없다. 그리고 층고를 높였다. 작은 공간임에도 넓어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층은 잠자는 작은 방 두 개와 큰 방이자 거실 하나, 옷방, 욕조가 있는 욕실로 구성했다. 문을 열어두면 이층의 공간이 하나가 되도록 작은 방의 문은 모두 미닫이로 했다.
콘센트는 몇개?
변기는 어디에?
설계에서 커다란 구조가 정해지면 디테일한 질문과 선택의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면 전기도면을 위해 몇 개의 콘센트가 어디에 얼마큼 필요한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콘센트가 필요한 곳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들어간다. 작업실 책상 위치는? 그에 따른 컴퓨터의 자리는? 모뎀과 프린터, 팩스는 어디 둘까? 여분의 콘센트는 2구로 할까? 4구로 할까? 싱크대 배치에 따른 오븐과 밥솥, 믹서... 전기선은 어디로 나와야 효율적일까? 그렇다면 주방 가전은 몇 개였더라? 커다란 냉장고는 어디에 두지?
조명은? 메인 조명은 어디에? 부분 조명과 벽등은 필요할까? 외부 등은 어디에 몇 개가 필요할까?
전기뿐만 아니라 창문과 문은 어느 정도 사이즈로 어디에 위치할 것인지? 화장실 위치는 정해졌는데 그렇다면 변기는 어느 방향으로 어디에 놓을 것인지? 세면대는? 끝없을 것 같은 선택과 결정을 해야 했다.
그동안은 콘센트가 놓인 자리에 맞춰 책상을 배치하고 컴퓨터를 놓고 작업했다면 새로운 집에서는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컴퓨터를 놓을 수 있게 된다. 공간 감각이 부족한 나는 살고 있던 집 방바닥과 벽에 줄자를 데고 치수를 재며 넓이와 높이를 가늠했다. 설계도면을 노트북에 띄어놓고 거듭 생각하고 실제 비율로 책상과 의자를, 나와 가족의 동선을 그려 넣었다.
하루는 이층 화장실 사방을 타일로만 둘러싸고 싶지 않아서 온 가족이 잠든 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시선이 머무는 높이를 수성 사인펜으로 표시하고 타일 위로 창문을 그려 넣었다. 정사각형 창문을 그려보고 다음은 가로로 긴 창문을 그리다가 아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가 싶었다.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 내가 책임지는 선택은 작은 콘센트 하나도 화장실 변기 위치도 창문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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