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를 잡고 집을 지어요.
'어진아' 이른 아침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겨울이라 춥고 어둑어둑해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대충 얼굴만 씻고 두터운 점퍼를 입었다. 엄마를 따라 집을 나섰다. 주차장에 세워둔 흰색 프라이드 앞자리에는 가스버너와 큰 냄비 하나, 냄비 안에는 성냥이 한 곽 들어 있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냄비가 달그락거리지 않게 꼭 끌어안았다. 엄마가 바라던 아파트,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그 당시) 프리미엄 층인 삼층으로 이사 가던 날 새벽. 이삿짐센터 차가 오기 전에 새집으로 출발했다. 이사할 때 정해진 시간에 다른 짐들보다 먼저 불과 냄비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집에서 무탈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주역을 공부하고 집성촌에서 장손으로 어른 노릇하던 외할아버지가 정해준 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엄마와 나는 가만가만 움직였다.
제주시내 새로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 너른 주차장에 프라이드가 들어섰다. 냄비를 안고 우리 가족이 분양받은 102동 302호로 올라갔다. 내가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엄마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뒤 양손을 뻗어 천천히 집 안으로 가스버너와 냄비를 내려놓았다. 이제 아빠와 동생이 이삿짐 차와 함께 오는 일을 기다리면 되었다.
제주에는 집에 머물던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 있다. 절기상 대한과 입춘 사이 일주일 남짓한 기간으로. 섬에서 맡겨진 일을 다한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새로운 신들이 내려온다. 잠시 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사를 하고 집을 수리해야 큰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어왔다. 예전엔 신구간에 맞춰 전세와 사글세 매물이 많이 나왔었다. 물론 신축 주택 입주시기도 신구간 맞췄다. 이사와 집수리가 몰려 이사비용은 두 배 넘게 들었고 일해 줄 분도 찾기 힘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여하간 모든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시기라니...신들도 제주인들도 들썩거리는 시간. 전래 동화처럼 신비롭다.
제주는 땅이 척박해서 농사가 어렵고 비바람이 많아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자연에 기대어 순응하는 마음이 일상에 많이 남아있다. 그런 곳에서 자란 탓일까 나는 신이 있다면 그들은 커다란 나무에, 돌에 깃들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신구간이 내 눈에 신비롭고 외가의 주관으로 유난했던 엄마의 이사 방식은 특별한 기억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집을 지을 때 땅을 파헤치기 전, 제(祭)를 지내며 무탈하게 집 짓기를 할 수 있도록 기원한다. 터 잡는 전날 저녁, 가족과 집터를 천천히 걸었다. 땅에게 집을 짓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열네 살 이른 아침 커다란 냄비를 안고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조심스럽고 두근거리던 그 마음으로. 이곳에 순조롭게 집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집터를 다지고 나자 빠르게 목조주택이 뼈대를 드러냈다. 집을 짓는 동안 비도 바람도 강한 날이 없었다. 벚나무에 벚꽃이 지고 연두잎이 막 나올 무렵 일층 벽체가 마감되었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졌다. 이층에서 바라본 북쪽 바다는 아찔하게 반짝였다. 봄과 여름사이 한 번씩 오던 태풍도 그해엔 비켜갔다. 이럴 때 하늘이 도왔다고 하는 걸까. 순한 터에 순한 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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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 Impromptus, Op. 90, D.899
- No. 2 in E Flat Major: Allegro
(Pf.) Radu Lu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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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내내 같은 곡을 연습하는
둘째의 슈베르트를 듣는 주말 일기
(Feb 25.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