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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고따뜻한일상 Jun 10. 2024

순한 터에 순한 집

터를 잡고 집을 지어요.

이른 아침 엄마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겨울이라 춥고 어둑어둑해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대충 얼굴만 씻고 두터운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엄마의 흰색 프라이드 앞자리에는 가스버너와 큰 냄비 하나, 냄비 안에는 성냥 한곽이 들어 있었다. 냄비가 달그락거리지 않게 꼭 끌어안고 운전석 옆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바라던 대단지 아파트, 방 세 개, 화장실 두 개, (그 당시) 프리미엄 층인 삼층으로 이사 가던 날 새벽. 이삿짐센터 차가 오기 전에 새집으로 출발했다. 이사할 때 정해진 시간에 다른 짐들보다 먼저 불과 냄비가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집에서 무탈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302호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엄마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뒤 양손을 뻗어 천천히 집 안으로 가스버너와 냄비를 내려놓았다.


제주에는 집에 머물던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 있다.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사를 하고 집을 수리해야 큰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다는 오랜 풍습이다.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라니... 전래 동화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제주는 땅이 척박해서 농사가 어렵고, 비바람이 많아 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연에 기대고 순응하는 마음이 일상에 많이 남아있다. 그런 곳에서 자란 탓일까 나는 신이 있다면 그들은 커다란 나무에, 돌에 깃들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신구간이 내 눈엔 신비롭고, 엄마의 유난했던 이사 방식은 특별한 기억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무랑 돌이 예쁜 우리 동네 자랑)

집을 지을  땅을 파헤치기 , () 지내며 무탈하게  짓기를   있도록 기원하기도 한다.  잡는 전날 저녁, 가족과 집터를 걸었다. 땅에게 집을 짓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열네  이른 아침 커다란 냄비를 안고 새집으로 이사 가던  두근거리던  마음으로 이곳에 순조롭게 집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집터를 다지고 나자 빠르게 목조주택이 뼈대를 드러냈다. 감사하게 집을 짓는 동안 비도 바람도 강한 날이 없었다. 벚나무에 벚꽃이 지고 연두잎이 막 나올 무렵 일층벽체가 마감되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졌다. 이층에서 바라본 북쪽 바다는 아찔하게 반짝였다. 봄과 여름사이 한 번씩 오던 태풍도 그해엔 비켜갔다. 이럴 때 하늘이 도왔다고 하는 걸까. 순한 터에 순한 집이 순조롭게 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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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 Impromptus, Op. 90, D.899

- No. 2 in E Flat Major: Allegro

(Pf.) Radu Lu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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