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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Oct 24. 2021

살림산과 바다파편

둘째가 부르는 소리에 깨면 눈을 감은채 웅얼웅얼 대답부터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질 급한 다섯 살이 나를 사정없이 흔들고 큰 소리를 내, 옆에 있는 일곱 살 마저 깨우기 때문이다. 실눈 사이로 베개와 이불, 커튼의 윤곽이 보인다. 일곱 시가 조금 넘었다는 뜻이다. 아이를 따라 침실을 나온다. 가을이라 거실 공기가 제법 차다. 전날과 같은 상태일 텐데 지금이 좀 더 깨끗해 보인다. 살면서 나오는 생활 먼지가 깨어있는 동안 부유하다 자는 새 가라앉았기 때문일까. 말끔하다. 이 말끔함이 기분 좋다. 육퇴 후 당장 드러눕고 싶어도 기어이 모든 걸 정리하고 자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걸 알 리 없는 둘째는 정돈된 물건들을 끄집어 내린다. 잠든 나머지 식구들은 아랑곳 않고 장난감을 부스럭거리며 이거 보라, 저거 해달라, 배고프다 조잘거린다. 말끔함이 사라진다. 내 기분도 사라진다.


아침 메뉴는 주로 탄수화물과 식이섬유. 즉, 빵과 고구마, 사과다. 다른 메뉴는 취급하지 않는다. 핫도그를 먹기도 한다. 이런 메뉴의 좋은 점은 오븐이 알아서 조리를 해준다는 것이다. 단점은 뒤처리할 게 많이 나온다는 것. 아이들은 온몸으로 빵을 묻히며 먹고 식탁과 바닥은 금세 부스러기 투성이가 된다. 부스러기를 뭍힌 아이가 자리를 떠난다. 부스러기는 아이를 따라 놀이방으로 침실로 간다. 허리를 구부려 바닥을 훔친다. 에구구- 탄식이 절로 나온다. 난 언제부터 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까. 아이들에게 등원 준비를 지시하면서 머리 한 구석으로 준비물을 떠올린다. 청소가 끝나면 베란다로 가 세탁기 전원을 켠다. 빨래를 돌리며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관찰한다. 노는 중간 비명 소리와 함께 나에게 와 하소연을 하면 들어주기도 하고 중재하기도 한다. 볼일을 보고 난 후엔 물티슈로 변기를 닦고 냄새가 나는지 확인한다. 이 모든 행위 틈틈이 바닥에 있는 다칠만한 거리나 더러운 쓰레기를 분류해 처리한다.


CCTV 집안을 녹음해본다면 나의 모습은 한폭의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 아닐까. 간혹 이렇게 생활 냄새가 나는 명화가 있다. 아니.  시선이 그렇게 변한건지도 모르겠다. 미술을 전공해놓고 풀밭 위의 식사를 보면 옷을 입혀주고 싶고 피카소의 도자기를 보면  그릇에 먹음직스럽게 담긴 파스타가 떠올.


결국 둘째의 저지레가 심해져 손 닿지 않는 곳에 숨기게 되었다. 주로 갯수가 많은 단어카드이거나 파츠로 이루어져있는 조립품이다. 찾을 줄 알았는데 있는 장난감을 잘 놀더니 이번엔 책장을 들쑤시기 시작한다.

 쓰나미처럼 몰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바다파편처럼, 놀이방 바닥에 쏟아져내린 책들을 쓸어담는 하루다. 가사는, 틈새 노동이고 잠깐 방심한 사이에 산처럼 쌓여버린다. 산을 옮기려면 더 나은 에너지가 필요하니 작은 언덕일 때 처리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지런한 아침 새처럼 움직여도 매일이 등반의 연속이다. 파도는 언제나 돌아온다. 쓸어담은 바다파편은 밀물에 쓸려오고 간혹 자동으로 쓸려 나가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같은 살림산과 바다파편의 먼지들. 자연에게 이유를 묻는건 무의미하다.


오늘도 하루종일 책장을 정리하고 허리를 구부려 바닥의 물건을 줍는다. 밀레의 그림 속 여인처럼, 이것이 벼이삭이라고, 이 한번의 줍기가 집안의 말끔함과 내 기분에 기여한다 생각하며 기꺼이 한다. 언제고 허리를 펴 저 멀리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을때 만종처럼 아름다운 노을이 내 마음을 적시고 그 아름다움에 감사함이 밀려오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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