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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재미양 Oct 24. 2021

마음이 채소라면

소비기한과 유통기한이 다르다는 걸 최근에 배웠다. 식품을 판매할 수 있는 날짜가 아닌 먹어도 되는 날짜. 영어로는 Sell by date가 아닌 use by date. 찾아보니 기성품에 이런 날짜가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2012년도부터인데 날짜에 예민한 나도 최근에 알았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란 생각도 든다. 한편으론 이 날짜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게 의문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구나, 여러 날짜를 꼼꼼히 따지기엔 삶이 너무 고달프구나 바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식단 한 끼에 기성품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우유나 치즈 유제품은 물론이고 통조림, 두부 등 공정을 거친 식재료들. 기성품이 식재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결정해야 할 것도 많고, 고민해야 할 것도 많다. 하지만 그 모든 제품을 일일이 따지기엔 두 아이 엄마의 하루는 너무 짧다.


먹을  있는 날짜와 다른 날짜를 고민하던 어느 , 친구로부터 시든 채소를 얼음물에 넣으면 다시 신선해진다는 말을 들었다. 다양한 신선재료를 상자로  먹는 친구는 아마도  많은 양을 일일이 신경 쓰다 제때 먹지   경험이 많았나 보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얼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가장자리에 물이 맺힌 얼음이 동동 떠있는 물을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들이지만, 선뜻 집에 얼음 정수기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운 물이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특히 아이들이나 이빨이 약한 어른에게 말이다. 그런 이유로 먹고 싶은 사람이 얼음틀 직접 얼려 먹도록 의논했고 올여름이 반이나 지났지만 집안  누구도 얼음을 얼리고 있진 않다. 집에 얼음이 없다고 웃어 보이자 친구도 같이 웃었다. 그렇지 누구나 집에 얼음이 있진 않겠지. 문득, 얼음 정수기에 버튼을 누르는 친구를 상상해본다. 띠로롱 귀여운 소리와 함께  토도독 얼음이 대야에 떨어진다. 그대로 거기에 물을 받아 시들해진 채소를 담근다. 마법처럼 되살아나는 채소를 보며   채소의 쓰임새를 궁리하는 친구를 떠올리자  모든 과정에 기시감이 들었다.


마음이 한창 널뛰기를 하는 시기였다. 오전이 되면 아이 둘의 감정싸움과 나의 일과로 고군분투해야 하고, 새벽이 오기 전에 내게 주어진 시간에 작업을 했다. 육아와 살림과 작업의 뒤엉킴속에서 마음은 그야말로 니맛도 내 맛도 아닌 음식처럼 밍밍해졌다. 내 맛을 내면 아이들이 힘들고, 니맛을 내면 내가 힘들었다.

내 마음이 처한 모양새가 그랬다. 풀 죽은 채소. 온도에 절여진, 먹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난 상태. 마음 역시 신선도가 유지되는 기간이 있는 것일까.  


신선도를 잃은 마음을 얼음에 담가 다시 생생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 저 어딘가 냉장고 나라가 있고 풀 죽은 마음이 얼음을 찾아 떠난다. 시원하게 마음의 몸을 뉘이고 살아나길 기다린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라는 문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내 마음 어딘가 얼음 얼릴 자리를 남긴다는 것. 마음을 차가운 곳에 두면 시든 채소가 살아나듯이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 마음이 재생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유통기한이 제품을 먹기에 최적의 기간 표시가 아니라고 한다는 걸 알았을 때, 먹어도 안전한 기한이 따로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언제나 아등바등 재료를 소진하기 바빴다. 사실은 생각했던 것 보다 길다는 뜻이고, 나는 여유를 번 샘이었다. 통조림 하나의 소비 기한은 2년, 두부의 소비 기한은 6개월, 우유의 소비기한은 3개월. 특별히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데 마음이랑 흡사하다. 채소의 소비기한은 보다 정직하다. 눈에 보인다. 채소를 얼음에 넣어 신선도를 벌 듯, 소비기한을 알고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벌 듯, 육아하는 중간중간 내 마음이 한 포기의 채소 다발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이 채소라면. 흙을 떠난 내 마음이 시들면 친구가 하듯 살얼음 동동 뛰운 물에 내 마음 한편을 담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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