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재미양 Feb 03. 2022

돈까스와 칼국수

느린 둘째가 말을 시작했다. 느린 아이란, 인터넷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다. 겪어보니 흔하다. 한창 바깥세상을 배워야 하는 나이에 코로나로 많은 것들이 차단된 탓이라는 연구가 흘러나온다. 이제는 사회적 현상이 되어버린 느림의 중심에 선 둘째가 어느 날 말을 시작하자, 누구보다 반가운 건 누나였다.


첫째는 어디를 데려가도 감탄을 들었다. 아이가 너무 또리방하다, 말을 잘한다, 야무지다, 그림을 잘 그린다, 건강하다, 튼튼하다 등등. 첫째를 키우는 기간 동안 힘들었다는 생각을 한적은 없다. (물론 마의 취학기를 바라보며 지금은 조금 힘들다.) 오히려 첫 아이에 대한 환상과 미화가 가득한 풍경이 가득한 추억으로,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며 아이에게 나른한 눈빛을 보내곤 한다. '널 키울 땐 참 좋았지' 라면서 말이다.


둘째는 달랐다. 신생아 땐 모유를 토했다. 먹는 족족 올리는 바람에 분유로 바꿔 보았지만 젖병을 거부했다. 설상가상 배꼽이 튀어나와 탈장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괜히 온몸에 힘을 주는, 일명 '용쓰기'는 지금도 가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 선보이곤 한다. 이 행위의 변주로는 길 위에 드러눕기가 있다. 그 외에 아토피, 언어 지연, 호명 반응 없음 등등 한 줄로 요약하기 억울할 정도로 많고 많은 걱정과 우려를 안겨준 장본인이다.


태생적 차이에서 드러났듯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기와  만으로도 우적우적 식사만 잘하는 둘째는 단백질파다. 시금치도 다섯  돼서야 먹기 시작했고  외에 것들은 아직도 도전 중이다. 첫째는  살부터 자기 영양제를 챙겨 먹었다. 유산균, 칼슘제, 비타민 종류를 가리지 않았고 젤리, 가루, 시럽 형태를 불문하고 사다 놓은 것들은  뜨면 챙겨 먹었다. (지금은 커서 본인이 스스로 먹고 동생 몫까지 챙긴다.) 이런 첫째지만 의외로 고기를  먹는다.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먹는 고기는 채끝 등심. 음식의 종류보다 식감을 중시한다. 이런  아이의 식사를 마련하려면 난감한 상황에 부딪힌다. 일타쌍피를 노리는 양육자는 영양소를 고루 갖춘 식단으로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타짜가 아니다. 첫째가 좋아하는 종류가 나오면 둘째가 시무룩하고 둘째가 좋아하는 요리가 나오면 첫째가 불만을 터뜨렸다. 흡사, 둘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을    녀석이 눈을 감는 온오프 버튼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외식 역시 난제다. 둘 중 한명이 흰밥만 꾸역꾸역 먹게 하지 않으려면 손에 쥐나게 검색해야 한다. 의외로 취향이 다른 둘을 만족시킨 곳은 칼국수집. 놀랍게도 국수집에 돈까스를 판다. 지금도 여전히 이유를 모르겠는(아마도 다자녀가 그 탄생 배경에 있지 않을까 유추해본다.) 이 두 메뉴의 조합은 다행히도 대한민국 곳곳에 퍼져있다. 첫째는 얼큰한 국물에 쫄깃한 국수 면발을, 둘째는 기름에 자글자글 튀긴 돈까스를 공략한다. 물론 서로의 음식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런 극과 극의 모습이니 놀이 결을 맞추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대사를 쳐야하는 첫째의 놀이에 둘째는 눈치없이 공룡으로 공격을 하거나 가상 놀이인데도 진짜 두려워 비명을 지르곤했다. 지금의 놀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첫째는 아주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말이 느리니 소통이 어렵고, 소통이 어려우니 자신이 계획한 놀이를 함께할 수 없었다. 놀이는 무산되고 부서지고, 무너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첫째는 울부짖었다. 동이 때문에 너무 힘들어!!라고. 그런데 어쩌나, 엄마인 나는 그 힘들다는 발산을 듣기가 힘들었으니. 힘듦의 뫼비우스의 띠에 빠져 버린 꼴이다. 우여곡절 끝에 둘째가 자기 세상에서 나와 다른 이들을 참여시키기 시작했을 때, 첫째는 너무 기쁘고 적극적이어서 온종일 동생을 부르기 바빴다. 그렇게 첫째는 둘째를 통해 느림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 둘째는 첫째로 인해 먼저 나선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들을 관찰하며 작은 사회를 목격한다. 우리들은 서로 너무 다르고 고유하다. 당장 나와 함께 가정을 꾸린 남자조차도 너무 달라 종종 속이 상하는데 오죽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무리를 이루고 그 안에서 서로 보듬고 받아주고 이해하며 살아간다. 아이들이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모습은 관계에 대해 항상 고민스러운 내게도 큰 공부가 된다. 너무도 다른 두 아이가 어느 날 칼국수와 돈까스를 먹으러 갔다가 서로에게 음식을 권하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 이것 좀 먹어봐, 생각보다 맛있어.

- 그래? 좀 줘봐. 내꺼도 먹어볼래?


 서로의 경계를 한 입씩 맛보면서 커갈 상상을 하니 우리가 어째서 다르게 태어났는지 본질적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예쁜 상상이 아닌, 공존에 대한 큰 그림을, 아이들이 그려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둘을 낳아야 하냐는 여타 외동집의 고민에는, 여전히 답이 어렵다.

단지, 예쁨만큼 미움도 감당할 수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 볼 일인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퍼즐조각이 많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