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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Jan 10. 2019

놀아라, 미친 듯이

여섯 살 자두의 겨울 생존기

첫눈답지 않게 소담스럽던 첫눈이 내린 뒤, 너무 오래 소강상태다.

이제 올 때도 됐는데, 건조한 겨울 날씨만 이어지니 하릴없이 자꾸 하늘을 보게 된다.

"엄마, 눈은 왜 한 번밖에 안 와?"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하다.

"눈은 왜?"

"눈썰매 타려고."

"눈 없어도 잘만 놀잖아."

아이도 그 말이 맞다 싶은지, 더이상 대꾸가 없다.


요즘,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갈 때마다 새로이 하는 일이 생겼다.

바로 옷 털기.

온통 지푸라기, 뽀얀 흙먼지가 가득한 겉옷을 팡팡 털어 주어야 한다.

한동안 유난히 피곤해한다 싶었더니, 그게 옷으로 신나게 썰매를 타서 그랬던 거였다.

눈이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아이들은, 눈이 없어도 썰매를 탈 수 있다는 걸 발견했고

결국은 날마다 옷을 깔고 잔디썰매를 타기 시작했다.

깔고 타라고 아빠들이 비료 포대를 잔뜩 구해다 줬는데도, 포대는 뒷전이고 옷을 깔고 탄다.  


볼은 빨갛고, 손등은 트고, 콧물을 훌쩍인다.

그래도 논다.

밖에서 신나게 논다.

"나들이 갈 때 마스크 좀 하고 가면 안 될까?"

아침마다 당부를 해도, "응" 하는 대답은 그때뿐이다.

"답답해." "마스크 하면 재미없어."

이유도 여러 가지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밖에서 아예 놀지도 못할걸?"

"치사해. 나는 노는 게 일이라며?"


앗! 또 당했다.

엄마가 해 준 말들을 머리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넣어 놨다가 적재적소에 잘도 꺼내 써먹는 저 재주는 도대체 누가 알려 준 것일까?

언젠가 엄마가 하는 일, 아빠가 하는 일 설명해 주다가 "그럼, 나는?"이라고 묻길래,

"우리 자두는 노는 게 일이지!" 하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걸 이렇게 써먹는구나.

좀 나중에 가르쳐 줄걸 그랬나.

아무튼 신나게 놀고, 아프지만 말아라.


생각해 보니, 내 어린 시절에도 제대로 챙겨 입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놀았다.

없이 살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뛰어놀면 그렇게 더웠다.

못둑 어딘가에 겉옷 벗어 두고, 아부지가 사과 상자 엮어 만들어 주신 썰매 타고 하루 종일 놀았다. 동네 어느 어른이 피워 주고 갔는지, 아님 동네 오빠들이 피웠는지, 모닥불 곁에 옹기종기 모여 곁불 쬐다가 젖은 양말 마를 새도 없이 얼음 위로 돌아가 또 놀았다.

겨우 내내 눈만 뜨면 못으로 달려가 얼음 위에서 놀다가 바람 색깔이 달라지고 얇아진 얼음에 발이 빠지는 아이가 생기기 시작하면 겨울 못둑 얼음 놀이는 끝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에 아랑곳않고, 롱패딩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시절을 참 잘도 보냈다. 


엄마랑 아빠는 그렇게 신나게 놀았으면서, 내 아이에게는 그런 오늘을 선물하지 못한다.

마당 없는 아파트에 살면서, 놀러갈 시골집이 없는 아이가 안쓰러워

날마다 나들이를 가는 어린이집을 어렵게 찾아내 보내고 있다.

더러워져 봐줄 수가 없는 옷을 보며 그래서, 하하 웃을 수 있다.

그래, 잘 놀고 있구나.

더 놀아라, 마음껏, 미친 듯이, 원없이!

엄마에게는 비장의 무기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으니. ㅎㅎ


#공동육아어린이집 #나무를키우는햇살 #겨울눈썰매 #여섯살겨울 #잔디썰매


눈이 있을 땐 눈썰매를 타고
눈이 없을 땐 잔디썰매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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