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와 푹신이>, <엄마 마중>
“푹신이는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푹신이는 할머니한테 아기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모래 언덕 마을에서 왔습니다.”
하야시 아키코의 그림책 <은지와 푹신이>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여우 인형 ‘푹신이’는 아기 ‘은지’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곧잘 기어 다닐 수 있게 되자 은지는 푹신이를 깔아뭉개고 그 위를 기어 다녔어요.
처음으로 신발을 신던 날, 은지는 푹신이의 꼬리를 잡고 아장아장 걸어 다녔어요.
그래도 푹신이는 은지와 노는 것을 제일 좋아했어요.
둘은 항상 함께 놀았고, 은지는 점점 자랐어요.
하지만 푹신이는 점점 낡아졌지요.”
결국 푹신이의 팔이 낡아서 터져 버렸고, 모래 언덕 마을로 가서 할머니에게 팔을 고쳐 달라고 하기 위해 은지와 푹신이는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할머니 집으로 떠나는 둘은 보는 이를 아슬아슬하게 만들고 대견한 마음도 들게 합니다. 결국 푹신이가 할머니 손에서 깔끔하게 새로 태어나는 장면에서, 책을 같이 보던 아이가 묻습니다.
“엄마! 우리 마중이도 이렇게 새로 만들어 주면 안 돼?”
손재주 없는 엄마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다.
‘마중이’ 역시 푹신이처럼, 우리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집에 와 있었던 인형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파주에 있는 출판단지에서 <엄마 마중> 책과 함께 데리고 왔던 아이지요.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뭐예요?”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메아리>(이주홍 글, 김동성 그림, 길벗어린이) 그림책을 꼽을 만큼 저는 김동성 작가의 그림책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엄마 마중> 책을 보자마자 샀던 것인데요. 이태준 작가의 글도 좋지만, 이 책의 압권이랄 수 있는,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가 코가 빨개지는 장면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림 작가의 몫이 크다 싶습니다.
아이가 아가였을 때부터 <엄마 마중>을 열심히 읽어 주었던 덕분인지, 토끼 인형, 다람쥐 인형, 곰 인형, 온갖 인형들을 침대에 다 놓아 주어도 찬영이는 ‘마중이’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자곤 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에서 나온 인형을 아이가 좋아하니, 뭔가 뿌듯하고 가슴 벅차고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마중이’를 자기 동생이라고 하면서 앉혀 놓고 밥도 먹이고, 업어도 주고, 소꿉놀이 동반자로 삼기 시작하더군요. 잘 때는 ‘마중이’ 코를 부비부비하면서 잠들었고요. 자다가 뒤척일 때도 더듬더듬 ‘마중이’를 찾아서 인형 코를 자기 코에 갖다 대고서야 안심하고 잠들었습니다. 여행을 갈 때도 반드시 데려가야 했고, 네 살 가을부터 제 방에서 혼자 자는 연습을 시작했을 때도 “마중이가 있으니까 괜찮아.” 했습니다.
사실, 우리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애착 인형을 따로 가지고 있는 아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만화영화 ‘스누피’에 나오는 라이너스는 늘 담요를 질질 끌고 다니는데, 이 만화를 보면서도 ‘쟤는 도대체 왜 저래?’ 의아하기만 했고요. 거기에 ‘담요증후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어 있는 줄은 아주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일찍부터 아이를 혼자 재우는 서양에서 애착 인형이 발달한 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생활 패턴이 달라지면서 각자의 방이 생긴 아이들에게 애착 인형을 안겨 주는 일이 늘었습니다. 아동심리학 책에서 엄마, 아빠와 충분한 애착이 생긴 뒤인 12개월 이후가 애착 인형을 안겨 주기에 좋은 시기다, 말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만 그건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점점 낡아 가는 ‘마중이’를 보면서 마음이 급해진 건 엄마, 아빠였습니다. 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마중이’ 코가 떨어질 지경이 되어 결국 그 코를 다른 천으로 덮는 수술(제가 바느질 솜씨가 없어서 조각 천을 덧대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을 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새로운 ‘마중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엄마 마중> 그림책 인형 이야기를 함께 올려둔 개인 블로그 운영자들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사정을 설명하고, 혹 그 인형이 필요치 않으시다면 판매해 주십사, 정중히 부탁드렸지요. 스무 분 정도에게 메일을 보냈고, 다섯 분이 답장을 주셨습니다. 분명히 창고에 뒀는데 못 찾겠다는 분, 이사하면서 잃어버렸다는 분, 아이 사촌동생에게 물려줬는데 버렸다더라 하는 분, 안타깝지만 너무 낡아 버린 지 오래라는 분, 나중에 인형 박물관 만들 생각이라 팔기는 어렵겠다 하시는 분까지, 결국 실패였습니다.
다음은 아이 아빠 차례였습니다. 이 인형을 처음 만들었던 한길사 창고까지 뒤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엄마 마중>이 지금은 보림출판사에서 나오지만, 처음엔 소년한길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초판이 나온 것이 2004년, 인형 패키지가 나온 것이 2006년입니다.) 한정판으로 생산되었던 이 인형은 그때 이후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고, 혹시나 해서 한길사 영업부에 문의를 해 보았던 것입니다. 마침 아이 아빠와 아는 사이였던 그분 덕분에 창고를 뒤지고, 인형을 가지고 있을 법한 당시의 직원에게까지 연락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구할 수 없다, 였습니다.
그러고도 우리의 ‘마중이’ 구하기 프로젝트는 계속되었습니다. 애착인형을 고치고 새로 만들어 주는 업체에 문의를 했더니, 제작 기간 2주에 가격이 38만 원쯤 들 거라 했습니다. 허걱.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드는 것보다 기존의 인형과 ‘똑같은’ 인형을 만다는 게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요. 돈도 돈이지만, 아이가 ‘마중이’ 없이 2주 동안이나 지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 방법도 포기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새로운 ‘마중이’를 구했다 하더라도 아이가 그 새 친구를 지금의 ‘마중이’처럼 사랑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함께 보낸 세월을 간직한 건 아무래도 예전 ‘마중이’니까요. 어쩔 수 없이 낡아서 다 떨어진 옷이라도 갈아입히기로 했습니다. 손재주 없는 엄마는 돈을 쓰는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마중이’랑 비슷한 크기의 인형 가운데 옷을 입은 애를 사서는 그 애 옷을 벗겨 ‘마중이’에게 입힌 것이지요. 궁하면 통한다고 하던가요.
다 낡아 빠진 옷, 더러워진 얼굴로 ‘마중이’는 지금도 아이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왕관을 씌워 달래서 빨간 천으로 왕관을 만들어 씌우기도 했고, 어느 비오는 날에는 차 뒷자리에서 ‘마중이’를 꼭 쥐고 잠든 아이를 안고 들어와 보니 ‘마중이’가 없어서 우산 들고 동네 바닥을 다 훑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홀딱 젖은 ‘마중이’를 찾아 들고 돌아와 얼마나 크게 한숨을 쉬었는지 모릅니다.
“목욕을 끝내고 수건으로 닦자, 푹신이의 꼬리는 처음처럼 푹신푹신한 예쁜 고리가 되었어요.
이제는 낡은 푹신이가 아니라, 새로 만든 예쁜 여우가 되었답니다.
다음 다음 날, 은지와 푹신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야, 잘 됐다!”
<은지와 푹신이>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기차에 꼬리가 끼고, 모래밭에 빠지고 우여곡절 모험을 함께 겪어 온 독자들은 이 장면에서 안심하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제는 걱정이 없습니다. 새로워진 푹신이와 은지는 집으로 돌아가 편안한 일상을 이어갈 테니까요.
그림책 한 권에서 빠져나온 인형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꼭 애착인형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의 인형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이와 함께 <프레드릭>을 읽으면서, <미술관에 간 윌리>를 넘기면서,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를 보면서 인형을 갖고 놀다 보면 어른의 마음도 한없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거든요. 어릴 적 마음껏 인형놀이를 못 했던 게 못내 한스럽다 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