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비 Feb 02. 2020

아이와 함께 준비하는 차례상

- 요리가 주는 즐거움을 깨달아 주길

꼬지 꿰고 있어, 할머니랑 나랑.     


식탁에는 찰적이랑 휴지 있고. 


맛살이랑 파랑 또 고추랑 또 버섯이랑 

내가 다 만들었어.     


맛있었지?    


부엌에는 뭐가 끓고 있는 냄비가 있고, 

그 옆에는 닭다리가 있어.     


내가 많이 도와줬어.     


- 2020년 1월 24일, 설 전날, 음식 장만을 끝내고        

 


작년까지는 설이고 추석이고 아버님 제사 때고, 자두는 아빠랑 같이 집 밖을 떠돌았다. 대개는 가까운 아쿠아리움에서 시간을 보냈고, 어린이박물관에 가거나, 극장에 가거나 해서 두세 시간쯤을 보내고 돌아오는 코스였다. 음식할 때 자두가 옆에 있으면 거짓말 조금 보태 1분에 한 번씩은 “엄마!” “엄마?” “엄마~” 불러대는 통에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있는 동안 불을 써서 하는 일은 대충 끝내고, 나머지 일들은 아이가 옆에 있어도 마무리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올해, 드디어 일곱 살이 된 아이를 옆에 두고 함께 차례상을 준비했다. 전에 입힐 달걀을 풀 때도, “내가내가!” 외치고 찰적 반죽을 할 때도 “내가내가!”를 외치며 물을 붓느라 애썼다. 아이와 함께 설 차례상을 준비하는 일은 더디긴 했지만 즐거웠다. 부엌을 치우고, 청소를 하고, 나를 돕던 남편은 안절부절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갈까?’ 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작년 추석 때, 자두가 주워 온 도토리 한 그릇(다람쥐들아, 미안해. ㅜㅜ)을 물에 불리고, 갈아서 가루를 가라앉히고, 끓여 낸 뒤 굳힌 손바닥만 한 도토리묵 한 접시를 차례상에 올린 것도 그래서였다. 참 봐주기 힘든 양이었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묵이었지만 자두가 느낀 자긍심은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것이라 믿었다. 


“엄마, 할아버지가 맛있게 드셨을까?”

“그럼, 제일 먼저 드셨을걸!”

그러고 난 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엄마, 도토리묵 할아버지가 좋아하셨겠지?” 묻곤 했다. 가게에서 도토리묵을 보면 “엄마, 나도 이거 만들 줄 알아!” 했다. 도토리 줍는 것 말고 나머진 내가 다 했지만, 자두 머릿속에서 그 도토리묵을 만든 건 자신이었다. 


“엄마, 난 뭐 해?”

할머니와 엄마 옆에 당연한 듯 자리를 잡은 자두는 할 일을 달라고 요구했다. 

“꼬지,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버섯과 맛살, 고추와 쪽파를 차례차례 끼워 넣는 일을 맡기면서도 솔직히 ‘모양이 이상해도 아버님이 이해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웬일! 하나하나 신중하게 이쑤시개에 재료를 끼워 넣는 자두의 손끝이 제법 야무졌다. 할머니 옆에서, 그 절반쯤 되는 속도로 하나씩 꼬지를 완성해 가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하던지.

    

자두가 다니던 어린이집에 함께 다니던, 한 살 많은 형 ‘ㅂㅈ’이가 생각났다. 인지 교육을 따로 하지 않는 어린이집이라 ‘ㅂㅈ’이는 한글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상태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영어 유치원을 졸업한 아이들과 섞여, 출발선이 다른 곳에 서서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된 아이는 한동안 적응에 애를 먹었다. 그러다 엄마랑 요리를 시작했는데, 그게 아이의 자신감에 굉장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재료를 준비하고 불 앞에서 요리를 완성하고, 그것을 가족과 나누어 먹는 일련의 과정들이 아이의 마음에 커다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어린이 심리 치료 프로그램에 미술 수업, 요리 수업이 들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날 저녁엔 그림책 <마음을 담은 상차림>을 꺼내 읽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건강을 위해 차리는 삼신상, 백 살까지 건강하라고 차리는 백일상, 아이의 복된 앞날을 바라는 돌상, 신랑각시 어여쁜 잔칫상, 고임 음식 죽 늘어선 환갑상, 돌아가신 뒤 정성껏 차리는 제사상까지 김동성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 덕에 기분 좋게 살펴봤다. 


“때마다 상차림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다는 것을 자두가 이해했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아이가 설날 차례상 앞에서 자기와는 상관없는 상차림이라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일곱살의그림일기 #말로쓰는일기 #엄마와함께쓰는그림일기 #일곱살의그림책 #설날그림책 #아이와함께차례상차리기 #어린이요리사

작가의 이전글 겁이 많은 건 전혀 괜찮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