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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Feb 10. 2020

실패에서 배우게 하자

_ 아이에게 책방에서 직접 책을 고르게 하는 까닭


"이 책은 재미있어 보였어, 그림이. 

외계인이 편의점에 오는 이야기야.   

  

외계인이랑 사람이랑 막 얘기하는 거 재미있었어. 

헬크랩도 재미있고.     


응? 엉덩이 학교? 

그건 왜 골랐나 기억 안 나.     

엉덩이 탐정은 당연히 재미있지. 

브라운도 그려 줄까?"     


- 2020년 2월 3일, 동네 책방 다녀온 날 


         

아버지와 처음 함께 간 서점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졸업 선물로 책을 사 주시겠다며 서점에 가자고 하셨다. 

난생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선물이란 것은.

시골에서 농사 짓다 아이들은 시골에서 살게 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도시로 나온 우리 부모님에게 돈은 늘 부족했다. 먹고 자는 기본적인 일 외에 무언가 추가로 들이는 돈은 모두 죄악이었던 우리집에서 ‘선물’이란 사치 중의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다섯 남매 중의 막내인 나에게 돌아올 여유는 더욱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선물을 사 주시겠다며, 교과서가 아닌 책은 볼 필요없다 단호히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 책방에 같이 가자 하시는 거였다.


다소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집에서 15분쯤 걸어 도착한 서점에 손님은 우리 둘뿐이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의 분위기. 전면 유리창 가득 쏟아지던 햇살, 책방에 가득한 책들, 뿌옇게 햇살 속을 떠다니던 먼지들까지. 늘 책이 고파서 친구 집에 가면 노는 것보다 책 보는 게 우선이었던 나에게 책방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주머니가 홀쭉하니 그림의 떡이었다. 학교에서 내준 독후감 숙제 책도 사 보지 못하고 친구 것을 빌려 읽어야 했던 나에게 “아무거나 골라 봐라. 고르는 거 사 주께.”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놀랍고 놀라웠다.  


아, 그 힘겨운 선택이라니. 이걸 들면 저걸 사고 싶고, 저걸 들면 아까 본 게 눈에 밟혔다. 족히 30분은 들었다 놨다 한 것 같다. 어린이책 서점도 아니고, 생각해  보면 그 서점에 당시 내가 읽을 만한 책이 딱히 많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책이 아니라, 집에 가져가서 내 소유로 할 수 있는 책을 고르고 있는 그 시간이 말이다. 서점 주인 아저씨도 재촉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서두르라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껏 책을 보았고, 결국 한 권을 골랐다. 시조집이었다.


웬 시조집이냐고? 내 계산은 이랬다. 이 특별한 선물을 한 번 읽고 말 책으로 고를 순 없다. 보고 또 볼 수 있는 책, 누가 봐도 잘 골랐다 칭찬받을 수 있는 책, 아버지가 보기에도 흐뭇한 책을 골라야 한다. 이제 중학생이 되니, 뭔가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그럴 듯한 책을 고르자. 그래야 아버지의 선물은 이것으로 마지막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시조집이었다. 책을 사서 들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뒷짐 지고 앞서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 시조집은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읽고 또 읽었고, 본의 아니게 예습을 한 덕분인지 중학교 국어 시간이나 한문 시간에 덕을 조금 보았던 것도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책 선물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중학교에 갔더니 학교 도서관도 있고, 집 형편도 조금 나아져서 그렇게까지 책이 고프지는 않았던 것도 같다. 그래도 가끔, 햇살 환하게 쏟아지던 그 동네 책방에서 보낸 시간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자두가 여섯 살 때, 서점에서 처음 고른 책은 <엉덩이 탐정> 시리즈였다. 베스트셀러답게,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번쩍번쩍 진열되어 있는 책이니 아이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주인공의 그 엄청난 비주얼을 생각하면 아이들이 유혹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런 거 아니라도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어보긴 했다. 

“이건 형아들이 보는 책이야. 봐봐. 그림은 쬐금이고, 글자가 이렇게나 많은데?”

“괜찮아, 그림만 봐도 돼!”

물론 그림만 보지 않을 거란 걸 나는 알았다. “또 읽어 줘!” “다시 읽어 줘!” 무한반복될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샀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아이가 사고 싶어 하는 책은 부모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 아이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또래 아이들의 취향이 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서점에서 아이가 책을 고르고 살 기회를 주어야 한다. (…) 아이들이 책을 통해 얻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내 돈 주고 사는 경험도 쌓아야 한다. 엄마가 읽으라고 사 준 책이 아니라 돈을 내고 내 책을 사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책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 아홉 살 독서 수업 中, 한미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미화는 또 “어린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독서가 즐거우려면 자신이 원하는 책부터 읽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아이가 읽고 싶다고 고른 책은 엄마가 권해 주는 ‘추천도서’나 ‘권장도서’와는 결이 다른 책이기 쉽지만, 그 책을 고르고 즐겁게 읽는 동안 얻는 것들은 결코 어른이 줄 수 없는 종류의 기쁨일 것이다. 


자두는 서점에 갈 때마다 <엉덩이 탐정> 시리즈를 한 권씩 집어 왔고, 결국 그 긴 책을 몇 번씩이나 읽으며 목이 아픈 건 엄마와 아빠였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면서 ‘이러니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겠군!’ 하고 설득되고 말았고, 결국 일본에 들렀을 때 <엉덩이 탐정> 일어 판과 온갖 굿즈들을 집어 들고 오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자두는 <엉덩이 탐정> 시리즈가 주루룩 꽂혀 있는 책장 앞에 서서 책을 고른다. 참으로 희한하게도 아이는 글자도 모르면서, 책의 내용은 나보다 더 잘 안다. 3권쯤에 잠깐 나왔던 등장인물을 6권쯤인가에서 족집게처럼 찾아내고, 읽어 준 사람은 벌써 잊어버린 단서를 기억하고 있다가 귀신같이 범인을 잡아낸다. 



물론, 실패도 했다. 

“이거 사자, 엄마! 나, 이거 살래!”

신나서 외쳐 대는 아이에게 가 보니, 표지 한가득 엉덩이가 그려진 그림책을 들고 함박 웃고 있다. 아, 불안하다.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엉덩이가 그려진 그림이라 선택하려는 것이다. 온갖 엉덩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방귀 수업 이야기를 그린 그림책을 사서는 딱 한 번 읽고, “딴 거 볼래!” 했다. 

“니가 고른 건데?” 

“그래도 안 볼래.” 

“그럼, 다음에 살 땐 엄마 의견도 좀 들어줄 거야?” 

“음, 생각해 볼게.” 



아직은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진다는 게 뭔지 알기 어려울 테지. 그래도 자꾸 연습하다 보면 몸으로 배우는 것이 있을 거라 믿는다. 엄마 지갑에서 나가는 돈이 아니라, 자기 지갑에서 나가는 돈으로 책을 사게 되면,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기준을 세울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십 원어치는 더 현명해져 있을 거라 기대한다. 


“엄마, 오늘은 이거 살래!”

일곱 살 아이가 들고 온 것은 그림책도 아니고, 초등 저학년 읽기 책도 아니고, 적어도 3학년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은 동화책이다. 

“아니, 이건 진짜 형아들이 보는 책이야. 나중에, 더 나중에 보자, 응?”

“엄마가 읽어 주면 되잖아.”

이제는 그림만 보면 된다며 엄마를 설득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는 뻔뻔한 녀석.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랑 <피노키오> 같은 동화책들을 하루에 몇 챕터씩 읽어 준 내 잘못이라 해야겠다. 그림 없이 이야기로만 들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의 맛을 알아 버린 아이에게 그림 있는 책만 보라고 할 명분도 없다. 

“오늘은 그림책 한 권이랑, <그림 메르헨> 이야기 두 개 읽어 줘.”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한글을 따로 가르치지 않은 터라,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상태가 지속되겠지. 차라리, 그림책을 열 권씩 읽어 달라고 들고 오던 때가 나았으려나.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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