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79세 할머니와 7살 손주
할머니 생신이었어.
완전 최고 좋았어!
케이크에 불 붙여서 불었어.
완전 좋았어!
할머니 좋아하시는 거 보니까 나도 좋았어.
나도 할머니 선물 드렸어.
내가 만든 비누랑 양초.
진짜 아까웠는데.
열심히 만든 거라서.
그래도 할머니가 좋아하시니까 나도 좋았어.
_ 2020년 2월 10일, 할머니 댁 다녀온 날
미역국을 끓이고, 용돈 봉투를 준비하고, 저녁에 먹을 해물탕을 사서 할머니 댁에 다녀왔다.
부엌에서 분주한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자두는 이런저런 잔소리를 계속 해댔다.
“엄마, 국이 팔팔 끓어.”
“엄마, 고기 뜨거워. 조심해.”
미역국에 넣을 국거리 쇠고기를 미리 끓여 손으로 찢고, 불려 놓은 미역 넣어 다시 끓이는데 그걸 보고는 계속 뭐라 하는 자두. 참견도 하고 싶고, 뭔가 같이 하고 싶기도 한 거다.
“엄마, 할머니 케이크는 어디서 사?”
“엄마, 아까 할머니 용돈 봉투 챙겨야 한다며?”
짬짬이 아이 말에 상대도 해 주고, 점심 챙겨 먹고, 어머님 댁에 가져갈 것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잠시 아이가 정신을 쏟을 게 필요했다.
“너, 할머니 생신 선물은 뭘로 할 거야?”
“… 아, 생각 못 했네!”
그러더니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한다.
어린이집에서 생일 맞은 친구나 형아들에게 주던 선물은 나들이 가서 주운 돌멩이, 노랗고 빨간 열매, 억새 다발이나 구절초 꽃다발 같은 것들이었다. 아이 생각에도, 할머니한테는 그런 거 말고 다른 선물을 드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엄마 엄마! 이거 어때?”
2주 전에 자두가 비누 만들기 체험 가서 만들어 온 비누 가운데 분홍색 산타할아버지 비누랑 노란색 레고 모양 비누를 예쁘게 담아 드리기로 했다. 놀러온 동생이랑 같이 만들었던 루돌프 양초까지 아낌없이 담았다. 와, 통 큰 녀석! (망가진다고 만지지도 못 하게 하던 걸 선물로 내놓다니!)
할머니랑 같이 케이크에 꽂은 초들(큰 초가 7개, 작은 초가 무려 9개! 자두는 엄청 신나라 했다!)에 불 붙이고, 후~~ 불을 끄고, “생신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아이의 볼은 발그레 상기됐다.
생일이란 게 어느 정도 나이가 지나면, 조금씩 심드렁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케이크와 촛불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생일 축하 자리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두가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 모두에게 그저 그런 날이었던 생일이, 아이 덕분에 재미있는 날이 되었다.
사노 요코의 그림책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는 99번째 생일을 맞은 할머니가 나온다. 맛있는 케이크를 구워 함께 사는 다섯 살 고양이와 함께 먹기로 하고, 고양이에게 케이크에 꽂을 초를 99자루 사 오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서둘러 돌아오던 고양이가 냇물에 초를 빠트려 달랑 5개만 들고 온다.
“음, 5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구나.”
할머니는 케이크에 초를 꽂고 ‘다섯 살’ 생일을 축하하게 됐고, 다섯 살 마음으로 돌아간 할머니는 냇물을 껑충, 고기를 잡으러 첨벙, 아주 신나는 시간을 보낸다.
“야옹아, 내가 왜 이제야 5살이 되었나 모르겠구나.
내년 생일에도 초를 꼭 다섯 개 사렴.”
사노 요코의 유머 코드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그림책을 읽을 때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역일 정도다. 의사로부터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렇다면 이제라도’ 하는 마음으로 스포츠카를 사 버린 사노 요코라는 작가의 천진난만함이 그림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이 책을 특히 좋아한다.
물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정작 당사자에게는 굉장히 넘기 힘든 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시어머니 생각만 해 보면, 올해 무려 16개(큰 거 7, 작은 거 9)나 필요했던 초가 내년이면 달랑 8개로 줄어든다. 그만큼 더 단순해지고, 더 또렷해지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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