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 May 13. 2019

환희, 신비로운 무의식과 대화

파란만장 감정지도

꿈은 대부분의 정신학자들은 무의식적 정신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칼 융은 ‘꿈은 상징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무의식적 상황의 자율적인 자기표현이다.’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 욕망을 꿈은 상징적인 이미지의 비유이다. 나의 꿈을 예를 들어, 성적 욕망이 강해질 때 원두 커피콩이 깔린 방에서 큰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원두 콩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구멍은 성행위의 욕망이다. 이 당시 실연 후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성을 멀리하고 자의적인 금욕으로 감정과 본능을 억압하고 있었다.


내향적인 사람은 의식보다 무의식에 보다 더 지배를 받으며 생활하게 될 경향이 높은 것 같다. 현실의 고통을 잠으로 회피할 때 꿈은 계속 위험신호를 보여주었다. 미성숙하고 불행지수가 높을수록 무의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끌어내린다. 그래서 성장하지 않는 자는 운명대로 살게 된다. 본인은 자유의지대로 사는 것 같지만, 알고 보니 착각이었다. 내가 살아온 사건들을 나열해보니 무의식이 조정한대로 산 경우가 너무 많아 놀라웠다. 심지어 내 생각조차 그러했다. 한편으로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나를 재해석해보았다.





나의 태몽은 이러했다. ’ 청계천 사거리 고가다리에 커다란 액자가 걸려있다. 그 스크린 안에는 거대한 말이 나타난 역동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현재 내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리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연결해주는 이미지. 액자는 예술을 담는 그릇이며 또 다른 눈의 역할이다. 말은 격동적이며 열정, 혁명의 이미지이며 사람들을 이끄는 운송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다리의 역할은 이미 주어진 재능이 꿈을 통해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뒤늦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예술계통이었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학습했던 영역이 영화, 글, 그림, 사진은 모두 사각에 담는 예술이다. 태몽은 이미 내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내 정신영역을 탐험하면서 안 사실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무의식의 지배가 강했다. 습관처럼 해왔듯이 그 상황에서 도망가서 숨는다. 무의식은 난잡한 꿈으로 경고하고 상황은 더욱 악화가 반복되는 삶이었다. 결과는 똑같았다. 불행하고 불안정한 정신으로 불평불만하는 사람. 미성숙한 성인은 운명의 속박된 삶을 살게 되고, 성장하면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알고 있었지만, 과연 인간이 완벽하게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성인의 해탈의 경지가 답이라면 인류에 단 몇 명뿐이지 않는가!


내면 탐험에 집중한 시절 중요한 포인트가 된 꿈이 있다. 나는 꿈을 꾸고 난 후 환희를 느꼈다.


소녀 아이가 구멍가게 같은 곳에 있다. 전쟁이 났고 주의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나는 잠시 어디를 가야 하는데 아이를 놔두고 가야 한다. 어떡하지를 말하며 소녀를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린다. 소녀는 과자를 만지며 좋아한다. 이때 한 무리의 군인들이 행렬로 지나간다. 소녀는 군인들이 지나가는데서 그들에게 과자들을 나누어준다. 깬 후에 슬픔이 밀려왔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 떠올랐다.


소녀는 나의 아니마(여성성), 혹은 자아. 전쟁과 폐허 속에 군인들은 나의 과거들을 복기하고 이해하면서 새로운 재탄생의 과정, 그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줌으로써 통과의례가 아닐까. 드디어 한 단계 올라섰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다. 강렬한 꿈의 잔향이 오래갔고 환희가 올라왔다. 오랫동안 느꼈던 불안증의 원인을 알게 되고 사라졌다. 이후 무의식의 존재는 한층 실감이 났다. 이제 이 미스터리 한 무의식을 알고 싶어 졌다. 그래서 대화를 시도했다. 잠들기 전 메시지를 던졌다. ‘나의 내면의 악을 보여줘’. 즉시 무의식은 꿈으로 답을 해주었다.



갈대밭이나 풀이 나 있는 전경에 흙길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나는 아이들을 보호하며 서 있고 다리를 보고 있다. 다리 건너편에 멀리서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는 두려움과 긴장감을 갖고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리를 향해 걸어간다. 건너편 사람과 나는 서서히 다리 중간에 대치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의 외모와 똑같다. 마주 보며 서게 되자 또 다른 나는 눈동자가 빨갛게 되어 있고 나를 향해 씩 웃는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며 응시한다. 또 다른 나는 뒤돌아 다시 돌아간다.


시골이란 공간과 아이들은 내면의 순수함 혹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소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다리에서 나의 그림자와 대면했을 때  강렬한 대치국면은 내면의 선과 악이 대립하는 독특한 꿈이었다. 빨간 눈동자를 가진 또 다른 나와 대치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아이들을 지킨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순수성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에서 나오는 강렬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드디어 무의식 심연으로 진입한 상태였다.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았다. 전날 밤 나의 자아를 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강력하게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날 밤 꾼 꿈이다.



늘어져 있던 나, 친구가 와서 강의에 참석하라 지시한다. 큰 극장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 틈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스크린에서 거대한 3D 얼굴이 나를 본다. 그 옆에 세명의 연극인이 큰 얼굴에 둘러 서 있다. 나는 그들을 찬찬히 구경하며 바라본다. 목소리가 들린다. 심각하게 받아들여라~!


거대한 얼굴은 자기 원형상(무의식의 상위적 인격), 여성성(아니마), 남성성(아니무스)은 의식화되기까지는 반드시 인격화로 나타난다. 무의식은 나의 내면의 삼위일체를 보여주었다. 여리고 나약한 현실의 내 모습과 달리 꿈의 자기 원형상은 강렬하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였다. 자신의 진정한 힘을 확인했을 때 오는 환희는 일반적인 자기 계발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는 내적 환희로 치유되고, 그 어떤 명약보다 강하고 신비롭다. 이제 무의식은 내 자유의지를 인정해 주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현실을 안 것처럼, 왜 내가 무의식에 지배당하며 살았는지 알고 경악했다.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조금 알게 되면서, 이해되지 않았던 원인과 결과를 알았을 때 느꼈던 환희는 달랐다. 감정은 장시간 지속되며 흥분시키지 않았으며 차분했다. 환희란 우리가 희망했던 것보다 더 좋게 나왔을 때 느끼는 기쁨이다. 자기 계발을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했을 때 주어지는 환희는 삶의 패턴을 바꾸어놓는다. 나는 무의식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내 습관과 행동 패턴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회성이 발달하고 인간관계는 보다 넓어졌다. 불안증이 사라지고 타인을 보는 시선도 따뜻해졌다. 환희는 자기 성찰의 통과 의례로 무의식이 주는 감정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우주를 여행하는 외톨이를 위한 안내서 -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