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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Sep 28. 2019

이슬라마바드의 김치

꼴찌의 갈등극복 연대기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김치 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 나는 나는 너를 못 잊어~'
(김치 주제가 정광태)


난 안 먹고 잘 산다. 여행 1년이 넘도록 밥과 김치를 안 먹었다. 한국음식을 먹을 법 한데, 당시 몇 백 원을 아끼려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특히 이국땅에서 비싼 한국식당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어릴 때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시큼하고 매운 김치는 항상 도시락 반찬으로 있어서 억지로 먹은 기억 때문일까. 


입이 짧은 편이었는데, 장기간 배낭여행은 돈을 아끼겠다는 일념으로 본토 음식을 먹고 다녀서인지 식습관도 고쳐졌다. 두둥~! 그러던 어느 날 한계가 와버렸다. 밥과 김치, 비빔밥, 짜장면, 사발면, 떡볶이가 미치도록 먹고 싶어 졌다. 인간의 욕망 중 식욕을 가장 귀찮아했던 내가. 마침 김치 맛도 잃어버릴 무렵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생일을 맞았다. 옳거니 이때다 싶어서 여행 동행친구들에게 제안을 했다.


“오늘 내 생일인데 같이 한국식당 안 갈래?”
“오! 축하해. 좋아. 다 같이 가자.”


2명의 일본인 친구와 나는 한국식당을 물색했다. 몇 년 만에 생일파티인데 호텔은 못가도 고급식당 정도는 가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꽤 이름 있는 한국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넓은 도로와 고급 주택들이 일렬로 있는 곳에 하얀 건물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파키스탄에서 잘 사는 동네에 위치했다. 정장 차림의 동양인들과 잘 사는 파키스판 가족들이 오붓이 식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머리에 두건 쓴 나와 화려한 무늬의 반팔티와 펄렁이는 도포 차림의 일본 친구들.


문을 열고 들어간 룸 안, 바닥은 대리석이 깔려있고 독립된 공간에 마련된 원목 테이블과 좌석에 앉았다. 예상대로 건물 내부도 깔끔하고 정갈하다. 정장 차림의 사장님은 정중하게 메뉴판을 주셨다. 아마도 웬 거지 3명이 왔나 당황하시지 않았을까. 긴장된 마음으로 메뉴판을 열었다. 예상대로 엄청나게 비싸다. 평소 한 끼 식사비의 10배는 되는 가격. 어울리지 않는 식당에 온 느낌이지만 오늘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나처럼 거지 여행하는 친구들의 환한 웃음을 보니 화끈하게 쏘기로 마음먹었다. 


 




파키스탄의 물가에 비해 비싸지만, 한국 물가에 비해 비싼 편은 아니라고 자족하며. 돌솥비빔밥, 김치찌개, 된장찌개, 라면, 짜장면 등등 김밥천국에서 항상 먹었던 메뉴를 시켰다. 드디어 1년 만에 맛보는 한국음식.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돌솥비빔밥을 한술 뜨고 김치를 베어 먹었다. 수저를 듣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향긋한 밥 냄새와 시큼한 김치가 코끝을 자극하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뭐야?  음식 때문에 울컥하다니!' 난 당황했다.



“뭐야? 김치가 이렇게 맛있었나?”


우걱우걱 씹으며 말을 잊지 못했다. 생일 축하는 뒷전이고 일본 친구들도 ‘오이시이(맛있어)’를 연발하며 음식 먹기에 정신없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 척!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파티였다. 우리는 밑반찬도 남김없이 싹 먹어치웠다. 식당 사장님도 그런 우릴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그렇게 잊지 못할 내 생일파티는 한국인 DNA를 확인했다. 그 날 한 끼 식사로 올라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없었다. 기껏 한국식을 1년 안 먹었다고 감동을 해? 그렇게 밥과 김치를 그리워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딱히 내 처지가 가난한 여행자라 슬퍼서도 아니었다. 돈을 아끼며 다니는 게 배낭여행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던 때.  


지금 서울에 혼자 살며 김치를 사다 먹지 않는다. 그런데 김치가 냉장고에 없어도 없으면 안 되는 이상한 존재. 시골 할머니가 빨간 플라스틱 대야에 손으로 담그신 김치를 한 잎 베어 물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할머니의 사랑과 따뜻함이 이슬라마바드에서 먹던 김치로 전해졌을지 모른다. 


한국인에게 김치란 음식 이상의 특별한 존재인 것 같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처럼 밥은 힘을 주는 육체적 에너지원이라면, 김치는 민족의식을 확인시키는 정신적 에너지원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슬라마바드의 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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