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1. 이 책을 제목만 보고 골랐을 사람이 꽤 될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평소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쭉 훑어본 뒤에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을 고르는 게 내 습관이다. 남들은 뭐 보나 궁금해서 들여다보지만, 그래도 재미없게 남들이 읽는 걸 따라 읽진 않겠다는 쓸데없는 고집? 때문이다.
베스트셀러에서 유독 까다롭게 책을 고르는 나로선, 이 책을 집어든 결정적인 이유가 '제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재밌게 본 시청자이기 때문에. (손석구 팬이다.) 다만 뭐가 먼저인진 모르겠다. 이 책이 드라마를 보고 영감을 얻어 제목을 따왔는지, 그 반대인지. 소설 자체는 드라마가 방영되기 훨씬 전에 나오긴 했다.
2. 앉은자리에서 책을 다 읽은 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수많은 현대인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글을 오랜 시간 읽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예전에는 웬만한 책(특히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꾸역꾸역 다 읽어내곤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된 지가 오래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지면 긴 글을 읽기가 어려워진다고 한다. 스마트폰 속의 뉴스와 글들은 '읽는' 게 아니라 '보는' 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글씨를 쑥-하고 훑고 지나갈 뿐 머릿속에 인식하는 과정은 없는 거다. 아무튼 스마트폰에 익숙한 나도 긴 글을 잘 읽지 못하는데, 이 책은 약 3시간 남짓만에 다 읽었을 만큼 흥미롭고 재밌었다.
3.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사상, 가치관, 종교 등 무엇이든 가능하다. 거창한 게 아니어도 인간은 인생에서 누구나 추구하거나 중요시하는 가치가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돈(자본주의)이든, 가족(가족주의)이든, 자유(자쥬주의)이든, 그게 무엇이든 큰 틀에서 이데올로기다.
대한민국은 누구든 자유로운 이데올로기(사상)를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빨갱이'란 말의 위력이 살아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정치판은 물론이고, 온라인 뉴스 댓글에서 "빨갱이들이!"라는 글이 베스트 댓글에 오르기 일쑤다.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끝난 지가 오래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메카시즘이 판치는 나라다.
그들이 말하는 빨갱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는 모른다. 애초 빨갱이라는 단어의 시작부터가 '적'을 찾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던 단어였기 때문일 테다. 전쟁 이후 정부는 빨갱이 숙청에 나섰다. 친일파 숙청 대신에 빨갱이라는 새로운 적을 찾은 것이다. 군사정권을 거친 한국에서 빨갱이란 말은 더욱 퍼졌고,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군사정권에 반대하거나 바른말을 하는 시민들은 '빨갱이'로 몰려 고문당하거나 숨을 거뒀다. 군사정권이 끝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한 지금도 반대진영의 입을 막기 위한 가장 손쉬운 단어다.
이 책은 해방 이후 그런 '빨갱이'였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자란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다. 한국의 역사를 훑으며 빨갱이의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사상이 옳다, 그르다는 가치판단에 빠지지 않고 담담하게 그의 가족들의 역사와 상처, 동네 사람들의 삶을 그린 점에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끈다. 10대 후반에 주인공의 아버지가 선택한 사회주의는 여든둘, 그가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남았다. 아버지의 빨갱이짓으로 아버지의 아버지는 죽었고, 가족은 와해됐다. 친척들은 모두 연좌제에 묶여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소설 속 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자네, 지리산에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심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너무 진지해서 웃긴 이 말들을 아버지는 진지하게 내뱉는다. 그리고 삶 속에서 하나하나 실천했다.
죽을 때까지 빨갱이로 불린 아버지는 단지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바랐다. 해방 이후 좋은 국가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모두 다 같았지만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실패한 이데올로기라 아버지도, 가족들의 인생도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작가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모여든 이웃주민들과 아버지와의 인연 속에서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삶을 보여준다.
5. 작가의 문체도 마음에 든다. 짧으면서도 리듬감 있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책을 고향집에 두고 와서 인용하긴 어렵지만) 문장만으로도 등장인물의 상황과 마음이 상상되는 그런 '적합한' 문장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