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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Jun 20. 2021

쿠팡맨과 리키

영화 <미안해요, 리키>, 감독 켄로치





  소박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거창한 행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리키가 원한 것은 아내와 그의 자식들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집, 적어도 일주일에 3번 가족들이 식탁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었다. 


"매일 조금씩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꿈을 꿔. 발버둥 칠수록 그 안에 더 빠져들어가." 

-영화에서 리키가-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세상은 이미 불평등하게 설계돼있고 자리를 배정받고 나면 그 자리를 바꾸긴 어렵다. 설계된 시스템은 경로의존성을 띄고 앞으로 굴러간다. 시스템이란 돌은 굴러가는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치고 간다. 사람들은 왜 열심히 살아도 현실이 이 모양 이 꼴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삶의 고단함에 지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택배 배달원인 리키는 온갖 부당한 일을 겪는다. 큰 맘먹고 벤을 사서 시작한 택배일이었다. 끝도 없이 쌓여있는 택배 짐에 리키는 생수통에 소변을 보며 차에서 끼니를 대충 때운다. 일주일에 6일을 14시간 동안 일해도 끝나지 않는 일들이다. 아내인 에비는 간병인이다. 그는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지만, 돌아오는 건 노동자로서의 비참함이다. 리키와 에비가 먹고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자녀들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일에, 가난에 지친 가족들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낸다. 

 

  이 영화를 보면서 숨이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영화가 현실을 너무나도 생생히 그려서다. 쿠팡이 혁신처럼 내세운 '새벽 배송'은 이 사회의 '리키'가 가족들과 마주 앉아 먹을 저녁 식사를 수도 없이 포기한 결과물이다. 밤에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의 본성을 포기한 채 쿠팡맨은 밤 9시부터 다음날 7시까지 야간노동을 했다. 쿠팡에선 지난 1년간 과로 등으로 쿠팡맨 등 8명이 숨졌다. 우리는 새벽에 '샴푸'를 받아보는 대가로 누군가의 건강과 가족과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일하는 걸 네가 선택한 것 아니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는 어떤 행동들은 사회가, 현실이 사실상 강요한 것과 마찬가지일 때가 있다. 리키는 목공, 배수·배관, 콘크리트 치기, 무덤 파기 등 돈 되는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손에 걸리는 일들을 가리지 않고 했을 뿐이다. 대기업 회사원조차 지금 다니는 회사에 합격해서 갔을 뿐 골라가는 게 아니듯. 리키와 쿠팡맨은 가족들과 먹고살기 위해 택배일을 선택했을 뿐, 밤샘 노동과 장기간 노동 등을 선택한 게 아니다. 


  영화의 엔딩 역시 현실이다. 리키는 불량배 습격에 택배를 빼앗겼고 고가의 단말기는 부서졌다. 온몸을 두드려 맞은 리키는 만신창이가 됐다. 그의 보스는 그에게 '괜찮냐'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가 배상해야 할 금액을 알려줬다. 그리고 '내일 일할 수 있냐'라고 물었다. 내일 리키가 대체기사를 구하지 못하면 벌금만 100파운드(약 15만 원)이다. 


  리키는 결국 다음날 새벽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에비와 자식들이 그 몸으로는 절대 안 된다며 차를 막아섰다. 하지만 불량배에게 맞아 한쪽 눈엔 깁스를 한 리키는 다른 한쪽 눈에만 의지해 앞으로 나아간다. 어떤 영화에선 익명의 기부자가 나타나거나 운 좋게 로또에 당첨돼 주인공의 모든 빚을 갚아주고 끝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이 영화도 현실과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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