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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얼굴

모르는 얼굴과의 추격전

by 한걸음

바닥에 여러개의 얼굴이 놓여있는데 그 중 무엇이 내 것인지 모르겠다. 나를 나라고 정의하고 나서는 크게 흔들림 없이 살아왔는데 시간이 갈수록 딛고 있는 바닥이 요동쳐 중심을 잡기 어렵다.


요즘 나에게 새로운 얼굴이 보인다. 일반적인 나는 주목받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관심이 익숙한데, 긴장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류의 긴장을 즐기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발표할 사람을 찾으면 내가 나섰다. 지목당할까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끝까지 천장에 닿을 듯 손을 들었다.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내 목소리가 교실 전체에 퍼지면 떨리면서도 흥미로웠다. 나에게 집중되는 시간이 설레어서 기뻤다. 직장을 다니면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근무경력이 짧은 나에게는 사실 부담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안이 들어왔을 때 선뜻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앞에 나가 홀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청중들이 나에게 주목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즐거웠다. 마이크를 잡고 얘기를 하면 할수록 신이나서 얼굴이 약간 상기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요즘은 주목받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시선이 내게 꽂히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준비가 덜 된 것 같고 뭔가 놓친 게 있는 듯 해 항상 뒤가 허전하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되는대로 아무말이나 늘어 놓고 나면 기운이 빠진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복잡한 일이 있으면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하고 실수한 건 돌아보지 않는 편이다. 자책하는 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것인지에 집중하는 편이 시간 효율적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자꾸 실수를 돌아본다. 시상식 리허설을 진행할 때였다. 수상자 중 한명이 참석은 했지만 상을 받으러 단상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 이 사람의 상장을 빼 놓도록 진행자와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깜빡 놓쳐서 실제 시상식에서 수상 순서가 약간 꼬였다. 사실 큰일도 아니었는데 나는 집에 와서 두고두고 자책했다. 현장에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했으면 시상이 매끄럽게 마무리 되었을텐데 내 실수로 진행에 차질이 생긴 것 같아 미안했다. 자꾸 과거로 나를 데려다 놓고 ‘이때 이렇게 했었어야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하며 날을 세웠다. 후회와 반성도 한번이면 족하고 여러번 한다고 달라질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원하는대로 마음이 움직여주지 않는다.


이런 나를 보고 있으면 내가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서 낯설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나를 모르고 있었다는 열패감, 실망감이 뒤섞여 당황스러움이 몰려온다. 아니 사실은, 잘하는 것만 전시하고 못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단정치 못한 나를 시장 바닥에 내놓은 것 같아 부끄럽고 창피해 열이 오른다.


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수를 하더라도 적게, 잘못한 일은 나를 조금 더 여미고 단단하게 만드는 거름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효율성에서 자꾸 실패하고 있다. 실수는 실수를 부르고 부끄러움은 또 다른 창피함을 가져온다. 걸으면서 ‘내가 왜 이러지...’하며 뒤를 돌아보다가 앞에 있는 전봇대에 부딪히는 격이다. 누군가에게는 슬랩스틱 코미디가 될 수 있겠지만 나에겐 웃어 넘길 여유가 없다. 누군가 얕잡아보고 비웃을까봐 조바심이 나서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가 없다.


집 안 깊숙이 벽장 안에 가둬 보이지 않았던 못난 면들이 조금씩 탈출하고 있다. ‘안돼! 그건 나만 아는건데, 아니 어떤 건 나도 몰랐던건데, 이렇게 날뛰면 어떡하니? 내가 쫓아갈 수가 없잖아.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다 잡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어야 하는데 너무 빠르고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낯선 얼굴들을 붙잡으려고 계속 달리다 보니 숨이 차다. 가끔은 왜 달리기 시작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목이 마르고 숨이 가빠 헉헉대는 나를 본다. 이 달리기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다. 이 시간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남는다면 좋겠지만,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계속 달리다보면 반환점을 만날 수 있을까?


미련한 나는 아직도 달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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