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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질문의 벽에 갇혀. “너는 김치찌개가 좋아, 된장찌개가 좋아?” 라고 누가 물으면 “난 고추장찌개를 좋아해.” 라고 대답할 수 있는데 김치와 된장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거야. 둘 중에 뭘 골라야 할지 고민하면서.
또는 이런 말을 할수도 있겠지. “참 좋은 질문이야.” 엉뚱하지만 난 이 말을 좋아해. 서양사람들은 강연에서 누군가 질문했을 때 이런 말을 먼저 하더라고. 꼭 좋은 질문같이 들리지 않는데도 질문한 사람을 먼저 칭찬해줘. ‘좋은 질문을 자기에게 던져줘서 고맙다, 네가 질문을 해주니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 더 대답을 이어나갈 수 있어 좋다.’ 그런 의미이겠지. 이런 피드백을 받으면 질문한 사람도 기분이 좋아져. ‘이런 질문을 해도 되나 좀 핵심에 벗어난 질문이 아닌가?’ 고민하다가 얘기를 꺼낸 경우라면 더 그렇지. ‘아, 내 질문이 좋은 질문이구나, 앞으로도 충분히 궁금한걸 물어봐도 되겠구나.’ 용기를 얻게 될 거야.
음식을 좋아한다면 이것도 가능한 대답일테지. “난 무슨 찌개든 고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한걸!” 이런 대답도 할 수 있다는건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이라는 책을 보고 알게 됐어. 책 중간쯤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
“네 컵은 반이 빈거니, 반이 찬거니?”
두더지가 물었어요.
“난 컵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좋은데.”
소년이 말했습니다.
아주 많이 들어본 질문이야. ‘컵의 반이 비어있다는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줄어들었다, 얼마 없다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이고,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다는 대답은 긍정적인 면을 보는 사람이다.’ 라고 들었지. 하지만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든 반이 비어있든 그 존재 자체를 행복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는게 놀라웠어. 정신이 번쩍 깨더라고. 누군가 나에게 던진 질문, 그 질문에 대한 해석만 머리로 알고 있을 뿐 너머를 보지 못한 나는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지더라고. 사고의 차이 시선의 차이라는 것이 저런거구나. 나도 일상에서 누군가 던진 질문에 저런 답을 하면 좋겠다. 막다른 길로 접어들어 막막하고 고되다 싶을 때도 담벼락 아래 쪼그리고 앉아 틈새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를 보거나 구름이 둥둥 떠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막다른 골목에 있으니 이렇게 한숨 돌릴 수 있어서 좋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질문 너머를 보고 질문에서 벗어난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핵심은 유지하되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보는거지. 그러려면 연습을 해야겠지? 질문을 닫지 말고 질문을 여는 연습. 한계를 정하지 않고 시선을 넓히는 연습. 지금 글을 쓰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잠깐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봤어. 작은것부터 하나씩 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