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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생 Aug 22. 2024

해야하는 것에서 도망치지 않을 용기

수 없이 도망만 다녔던 기억

  나는 ENTP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MBTI를 가져온 교수님 아래서 연구하신 분의 분석이니까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혼자서 평가할때는 J인줄 알았는데 그건 그냥 나의 바램일 뿐이었다. 나도 안다 내가 그다지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계획적인 사람이 멋있으니까 J처럼 선택했다. 또 ENTJ의 대표인물에 스티브잡스가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를 했던 사람이니까. 여하튼, 이 테스트를 한 곳은 조금 특이하다.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모아 수업을 하는 곳에서 평가를 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95%의 학생이 P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계획적이지 못하다는건 확실히 성적에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공부를 안하는것/못하는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또 집중력이 없고 계획이 없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아마 처음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수업에 원체 집중을 못한다고 선생님이 부모님을 호출한 것이다. 말을 안들어서보다는 내 두뇌에 어떤 문제가 있는게 아닐지 걱정되는 정도였다고 한다. 중학생때는 아예 공부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게임이 좋아서 돌돌 말아서 가져다닐 수 있는 키보드를 쓰기도 하고, 미드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본 다음 화면 없이 대사를 듣기만 하면 드라마가 보이는 수준까지 반복하기도 했다. 'How I met your mother', 'White Collar' 등 재밌는 미드가 꽤 많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노는데 집중했다. 술도 마셔보고 싶었고 담배는 안폈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대학 진학에도 관심 없었고 남들 다 하니까 조금 '따라하는'정도만 했다. 나름 공부를 잘 하는 학교여서 전부 대학을 가기에 나도 수시 원서 6장을 썼다. 전부 내 성적엔 어림도 없는 학교들로. 그러다 운 좋게 흔히 말하는 지거국에 합격하게 되었다.


  물론 프로그래밍이라는 하나의 특기는 있었다. 꾸준하진 못했지만 나름 재능이 약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수준을 뛰어넘을 노력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금방 군대로 도망쳤다. 군대에서 재수를 해보겠다고 결정하고 전역하고 수능을 쳤지만 처참한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공부도 끝까지 완수하지도 못했다. 근데 또 학교에 돌아오긴 싫어서, 청소용역을 했다. 신라호텔에서 눈을 언제 치워보겠는가. 또 클럽에서 일도 했다. 비싼 술을 시키면 가져다주고 가끔 담배 심부름을 하고 팁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스타트업에 들어가 나름 또 안정적이면서 열정적으로 개발을 하기도 했다.


  스타트업에서도 미래가 잘 보이지 않아, 내 마지막 절벽 혹은 벼랑끝인 학교로 돌아왔다. 2학년으로 다시 시작하는 학교였다. 친구도 없고 또 공부할 의욕도 없어서 퇴학당하지 않을 정도로만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보니 눈 앞에 졸업이 와있더라. 우리학교는 졸업을 위해서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최소성적, 두 번째는 어학성적, 세 번째는 졸업시험같은 TOPCIT성적, 마지막으로 졸업과제다. 최소 성적은 간신히 달성했고, 어학성적은 중학생때의 미드 시청으로 훨씬 높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TOPCIT은 컴퓨터 종합시험이라고 보면 되는데, 기준 성적이 매우 낮아서 다들 통과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걱정이 되어 공부를 좀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치러가도 될 뻔 했다. 졸업시험. 정말로 힘들었다. 우리는 EHR이라고 하는 환자의 종합 정보를 이용해서 XAI라고하는 설명가능한 인공지능을 웹서비스로 구현하는 과제를 했다. 인공지능도 잘 모르고 내가 할 줄 아는건 웹밖에 없는데, 인공지능 모델이 준비되지 않으면 웹서비스를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중간 보고서에선 점수를 꽤 낮게 받았다. 이러다 졸업을 못하는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피드백을 준 모든 것을 다 만들기로 했다. 파일 업로드부터 꽤나 어려웠던 우선순위 설정까지 전부 만들었다. 시각화도 빼놓지 않고 작업했다. 그렇게 했더니 거의 최고점수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취업이나 사랑 가족같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지만, 정말 오랜만에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해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결과보다 더 좋은 점수가 나왔던 것 같다.


졸업과제의 핵심부분


  매번 도망만 쳤는데 이번엔 어찌저찌 도망치지 않았다. 이 뒤로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서일까. 사실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또 도망칠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어떻게든 졸업을 하려는건, 어쩌면 마지막 발악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발 내딛긴 했지만, 또 언제 어디로 도망칠지 모른다. 그래도 이번엔 도망치지 않을 용기를 얻었다. 그건 마침 이 시기에 찾아온 좌절감때문일지 모르겠다. 더 이상은 힘들어서 스스로 마음이 어려운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다 보니, 잘 도망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하기 싫은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나에게서도 도망치는 법을 배웠다. 하기 싫은 것도 곧잘 해내고 또 싫은 것도 잘 견뎌낸다. 여전히 도망의 유혹을 느끼는 순간이 많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인생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아직은 잘 견디고 있다. 도망치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다. 도망친 곳에는 또 다시 도망칠 것들이 한 가득 존재한다.


  그래서 그만 도망치려고 한다. 학교에서 도망치기 싫어서 졸업했고, 삶의 주도권에서 도망치기 싫어 직장에 들어갔다. 또 내 감정에서 도망치기 싫어 글을 썼고 현실에서 도망치기 싫어 달리기로 도망침을 대신했다. 그렇게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지만, 방향이 다르다. 나는 이제 도망치기 위해 걷거나 뛰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서 나아가기 위해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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