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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각] 다모클레스의 검(劍)과 리더의 불안

다모클레스의 검과 리더의 불안

by durant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다가 알랭 드 보통의 <불안>(2004)을 만나고 "불안을 철학하면 불안을 치유할 수 있다"라는 사미르 초프라(Samir Chopra)의 말에 기대어 <불안을 철학하다>를 읽었다. 이제 '불안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에서부터 '리더라면 불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불현듯 ‘다모클레스의 검’ 이야기가 생각났다.


다모클레스의 칼.jpg 리처드 웨스톨, 《다모클레스의 검》(1812)


[칼 아래에 있는 인간]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의 <투스쿨룸 논총>에 나온다는 한 일화를 보자.

"다모클레스는 자신의 왕인 디오니시오스에게 아첨하며 디오니시오스가 권력과 권위를 지닌 위대한 인물로서 비할 데 없이 행복하고 호사로움에 둘러싸여 있다고 찬양했다. 이에 디오니시오스는 다모클레스가 그 행운을 직접 맛볼 수 있도록 하루 동안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다모클레스는 왕의 제안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다모클레스는 수놓은 양탄자와 향기로운 향수, 아름다운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왕좌에 앉았다. 그러나 통치 기간 동안 많은 적을 만들었던 디오니시오스는 왕좌 위에 검을 매달도록 했는데, 이 검은 말꼬리 털 한 가닥으로만 손잡이가 지탱되어 있었다. 이는 왕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즉 많은 행운을 누리고 있지만, 질투심 많은 조언자나 하인, 중상모략하는 소문, 적대적인 왕국, 잘못된 왕의 결정,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이든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불안한 마음으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다모클레스는 더 이상 그토록 행운아가 되고 싶지 않다며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왕에게 간청했다. 발 밑에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왕관 위에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항상 공포가 드리워져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디오니시오스가 충분히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며,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안심하고 그 권력을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 또는 현재의 모든 리더들은 그가 ‘정의로운’지에 상관없이 늘 권한과 권력과 함께 책임감, 고독, 실패에 따른 불안 등 언제 떨어질지 모를 ‘불안’과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

리더는 결국 “불안을 통해 이끄는 사람(Leading Through Anxiety (Harvard Business Review, 2020)이기 때문이다.


[리더의 고독]

그러나, 그 ‘검’은 리더에게 단지 불안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나약함과 불안감은 그 구성원에게 안정감을 주기 위해 걱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신뢰의 상징처럼 행동하는 듯이 가면을 쓰기도 한다.

“높이 오르면 나는 언제나 혼자입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으며 고독이라는 냉기만이 나를 떨게 합니다.”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산비탈의 나무에 대하여(Vom Baum am Berge), 68p, 민음사)

이 니체의 말은 “높이 서 있는 리더는 모두 춥고 외로울 수 있다”라고 읽힌다. 그래서 리더는 정말 고독하다.


[두려움인가 책임감인가]

이러한 리더의 감정은 사실 두려움이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것들의 무게’를 나타내는 책임감일 것이다. 리더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실패’로 드러날 경우 떠오르게 되는 것들, 즉 직원의 미래, 고객의 신뢰, 회사의 명예, 사회적 영향력 등 때문에 리더는 밤잠을 설친다.

이것은 수동적(passio)인 외적 원인이 아니라 능동(actio)적인 내적 원인으로 인한 것이므로 “외부 원인에 흔들리지 않는 자유”(스피노자, <Ethica>)를 가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리더의 괴로움은 ‘권력의 위험’이 아니라 실수하면 안 되고, 감정적으로 보이면 안 되며, 불안해도 불안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하는 ‘인간다움의 억압’에서 나오는 것이다.


[리더가 ‘검’ 아래에서 살아가는 방법]

우리는 칼을 없애는 방법은 없지만 실존주의자처럼 칼의 존재를 인정한 채 살아가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첫째, 책임을 나누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좋은 리더는 팀을 믿고 위험을 분산한다. 칼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더 많은 손이 그 실을 붙잡아줄 것이다.

둘째, 취약성을 드러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리더가 완벽을 내려놓을 때 팀은 오히려 더 강해진다. 취약성(vulnerability, 상처받기 쉬움)은 약점이 아니라 연결의 시작점(브레네 브라운, <나는 불완전한 나를 사랑한다>)이기 때문이다.

셋째, 가치에 기반한 결단이 필요하다. 리더라고 해서 모든 선택이 옳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치에 충실한 선택은 언제나 의미를 만든다. 그 결단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책임감을 수반하는 자기 창조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넷째, 외로운 자리를 받아들이는 성숙함을 필요로 한다.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고독을 부정하는 대신, 그 고독을 통해 더 넓게 바라보고 더 깊이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


[사미르 초프라가 리더에게 해주는 말]

만일 사미르 초프라가 리더들에게 <불안을 철학하다>를 강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강조하지 않을까?

감정은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특히 리더는 구성원에 주는 영향력이 지대하므로 의식의 전환이 더욱 필요하다.


리더 본인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이 지속적인 경쟁의 스트레스에서 탈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경쟁의 건강한 형태는 사회적 관심(Gemeinschaftsgefühl, social interest)'라 보는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견해를 참고하여 경쟁을 승패만이 아닌 관계적 협력으로 보고 경쟁이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발전하기 위해” 참여할 때, 경쟁이 불안의 원천이 아니라 자기 성장의 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5. 11. 22, 한국 동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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