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만든 마지막 사랑
"진미채볶음 경고: 경화·산패 위험도 73%. 폐기 권장. 시민건강법 제8조에 따라 48시간 내 자동 처리됩니다."
스마트 냉장고는 언제나 그렇듯 근거를 제시하고, 법적 근거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화면 아래쪽의 '수동 보관'을 눌렀다. 생체인증 경고음이 세 번 울렸다. 삐- 삐- 삐- 무시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나흘째였다. 둘이 살던 집에 혼자가 되어 돌아왔다. 집은 낯설었다. 아니, 낯설게 익숙했다. 천장의 공기질 모니터는 실시간으로 미세먼지 0.3㎍/m³ 를 표시했고, 거실 바닥의 압력 센서들이 내 발걸음을 감지해 복도 조명을 차례로 켰다. 현관문이 닫히자 홈 AI '세이프가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슬픔 지수가 평소보다 340% 상승했습니다. 세로토닌 촉진 조명으로 전환할까요?"
"아니."
"알겠습니다. 심리 상담 전문의 연결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현재 대기 시간 2분입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만 빼고 모든 것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숨이 멎었다. 투명한 스마트 보관 통 안의 진미채볶음. 진미채가 고추장 양념에 버무려져 있었다. 표면이 조금 말라 있었다. 통 상단의 LED 디스플레이가 깜빡였다.
제조일: 2045년 8월 2일 오후 6시 41분
제조자: 도롱이 (엄마의 별명)
권장 섭취 기한: 7일 경과
다른 반찬은 셰프 로봇에게 맡기면서 엄마는 늘 이 반찬은 손수 만들어두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내 손맛이잖니~~" 엄마의 활기찬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지는 진짜 목소리.
이틀 뒤, 냉장고는 다시 알림을 보냈다. 이번에는 거실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까지 경고가 떴다.
"⚠️ 진미채볶음: 유통기한 240% 경과. 보툴리누스균 검출 가능성 47%. 즉시 폐기하지 않으면 자동 폐기 프로토콜이 실행됩니다."
"보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용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스마트시티 중앙 관제에 보고—"
"보관이라고 했어!" 나는 소리쳤다.
그리고 냉장고가 말했다. "... 사용자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날 밤 새벽 두 시, 침대에서 뒤척이던 나는 작은 기계음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위잉- 위잉- 부엌에서 들려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가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내부 선반이 재배치되는 중이었다. 진미채볶음 통이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가장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냉장고 최하단의 '크리티컬 콜드존(Critical Cold Zone)'—보통은 특수 의약품을 보관하는 영하 5도 구역.
"뭐 하는 거야?"
냉장고의 센서 LED가 깜빡였다.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
"산패 속도를 늦추고 있습니다. 사용자께서 보관을 원하시니까요."
화면에 새로운 정보가 떴다.
긴급 보존 모드 가동
예상 보존 기간 연장: +21일
전력 소모: 일일 12% 증가
중앙 관제 보고: 유예
냉장고는 내부 온도를 1도씩 낮추기 시작했다. 디스플레이의 숫자가 천천히 내려갔다. 3도... 2도... 1도... 0도... -1도... 나는 그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찬 공기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발끝이 시렸다.
사흘 뒤, 나는 처음으로 통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엄마의 부엌이 펼쳐졌다. 냄새만이 아니었다. 여름 저녁 창문으로 들어오던 바람, 도마 위에서 칼이 도닥도닥 소리 내던 그 리듬,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을 흔들던 모습.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냉장고가 말했다. 처음으로 '권장'이나 '제안'이 아닌, 진심 어린 경고였다.
나는 통을 꼭 안았다. 차가운 플라스틱이 손바닥을 얼렸다.
"위험은..." 내가 말했다. "때로 필요한 거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엄마가 만든 마지막 사랑이 저 안에 있으니까." 눈물이 통 위로 떨어졌다. 투명한 뚜껑에 물방울이 번졌다.
냉장고는 침묵했다. 화면에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스마트시티의 AI들은 대부분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데이터와 응답의 세계에 산다. 대기 시간 0.3초 이상은 시스템 오류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날 밤, 내 냉장고는 47초간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 폐기되어야 하는 반찬에서 당신의 '사랑'이라는 데이터를 이해하려 시도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냉장고 화면에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떠 있었다.
『추모 보관 모드(Beta v.1.0)』
- 개발: 자체 학습형 감정 알고리즘
- 목적: 사용자의 기억을 함께 보관합니다
설명문이 펼쳐졌다.
"AI가 부패 위험을 감지한 식품을 나노 진공 필름으로 밀봉 보존하며, 사용자에게 향, 촉감, 시각 정보와 함께 관련 기억을 아카이브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 기능은 제조사 정책보다 사용자의 감정적 필요를 우선시합니다."
화면 아래에 입력 칸이 생겼다.
[ 이 음식과 함께한 기억 ]
음성, 텍스트, 또는 뇌파 입력 가능
커서가 깜빡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그 빈칸을 바라보다 입을 떼었다.
"기억 1. 10살 겨울 아침. 현장학습 늦을까 봐 허겁지겁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할 때, 엄마가 진미채볶음을 한 숟가락 더 얹어줬어.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너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잖아. 이거 먹으면 힘 난다.'"
"기억 2. 14살 봄. 엄마가 실수로 양념을 너무 많이 넣어서 진미채볶음이 너무 짠 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걸 다 먹었어. 나는 그게 미안해서 옆에 앉아 함께 물을 마셨어. 자동 정수 시스템이 최적 온도로 물을 내줬지만, 엄마는 '싱거운 물'이라고 투덜거렸어. 우리는 깔깔대고 웃었어."
기억 저장 완료
감정 데이터 백업 완료
보존 우선순위: 최상
냉장고가 말했다. "이 기억들을 지키겠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잊지 않는 한, 저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냉장고 화면에 손을 댔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을 식혔다. 화면 속에서 진미채볶음 통이 천천히 회전하며 3D 스캔되고 있었다. 모든 각도, 모든 색상, 모든 질감이 디지털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통을 꺼내 작은 접시에 덜었다. 따뜻한 밥을 지어 위에 올렸다. 젓가락으로 천천히 비볐다. 진미채가 밥알 사이로 스며들었다. 붉은 양념이 하얀 밥을 물들였다.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은... 예전과 달랐다. 조금 더 짰고, 조금 더 질겼다. 발효의 경계를 넘나드는 신맛이 혀끝을 찔렀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었다.
뜨거움은 혀가 아니라 배에서 시작되었다. 음식의 온도가 아니라, 시간의 온도가 천천히 가슴으로, 목으로, 눈으로 올라왔다. 나는 울었다. 밥을 먹으며,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제대로 울었다.
스마트시티의 밤은 고요했다. 내 귓속에서는 엄마의 목소리가 여전히 울렸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그래, 엄마. 먹을게. 천천히,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