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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Feb 29. 2016

벽돌 한 장

수습일기

사쓰마와리 첫날, 나는 꽤 운이 좋았다. 어두운 밤 택시 앞창 너머로 가까워지는 경찰서는 거대해 보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쫄지 말자, 쫄지말자, 쫄지말자.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크게 한 숨 내쉬고 호기롭게 경찰서에 발을 내딛기는 했지만 역시 맨살에 닿은 현실은 서늘했다. 문들은 차갑게 닫혀 있었고 그곳에는 나를 도와줄 누구도 없었다. 눈 앞이 깜깜해졌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몰라 멍하니 있던 때 누군가 등을 툭 쳤다. “어디 기자세요?”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한 방송사의 수습기자였다. 경찰서를 나오다 우연히 만난 그녀는 알고 보니 ‘종로라인’의 최고참 수습이었다. 부서 회식을 하고 왔다며 술 냄새를 풀풀 풍기던 그녀는 앞서 두 달 동안 하리꼬미를 거쳤다고 했다. “어.. 안녕하세요, 저는..” 소개를 마치자 편집국장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버티세요. 어떻게든.” 경찰서 문을 거침없이 열어제끼고 능수능란하게 경찰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는, 좋은 교과서가 될 것 같았다. 입고리를 당겨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따라나섰다.


누구 말마따나 종로의 밤은 고요했다. 이리저리 여러 경찰서를 기웃거려 봐도 별다른 사건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침은 제 할 일만 했다. 보고 시간이 가까워 오자 그녀는 자신의 노하우를 보따리 풀듯 하나둘 꺼내보였다. 소방 관재센터를 비롯해 여러 가지 경로로 발생 사건을 찾았다. 벌겋게 달은 얼굴로 몇 분쯤 뚝딱뚝딱거리더니 종각 앞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하나가 나왔다. 그 뒤론 놀라운 광경의 연속이었다. 작은 진눈깨비는 금세 눈덩이가 됐다. 능수능란하게 소방서며 경찰서며 이리저리 전화를 걸더니 ‘종각 앞 교통사고’ 한 줄이 열 줄 스무 줄이 됐다.


운수 좋은 날의 결말은, 역시 불행이다. 그 오아시스가 신기루였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진 선배와의 첫 보고에서 나는 발가벗겨졌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움큼 쥐어주었던 것들은 모두 바스라졌다. 사고의 이유가 무엇인지, 누가 다쳤는지, 사고 차량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관계는 어떤지, 어느 쪽의 과실인지.. 선배의 예리한 추궁에 단 하나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직접 취재한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제대로 걷기도 전에 아니, 기기도 전에 달리려한 것이었다.


한바탕 혼쭐이 난 뒤 주머니를 뒤적이니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경찰들에게 받았던 명함들이 손끝에 걸렸다. 그녀를 흉내내며 의미없이 받았던 것들이었다. 공허했다.


거대한 성도 조그마한 벽돌 한 장에서 시작된다. 당연한 얘기다. 내가 만난 그녀 역시 처음부터 당찼을 리 없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힘든 시간들이 있었을 테다. 내가 부러워했던, 그 능숙한 모습들은 아마 지난 두 달간 벽돌들을 차곡차곡 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동기라곤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적어도 반 발짝은 앞서 있던 것이다. 그러니 어설프게 따라해본들 별 의미가 없을 수밖에.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모양이 삐뚤빼뚤하더라도 나만의 벽돌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생활 첫날,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201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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