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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Oct 28. 2023

막춤의 쓸모

월간에세이 기고글


<막춤의 쓸모>

혹시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를 아시나요?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입니다. 얼마 전 그가 쓴 <가수들>(1852)이란 단편을 읽었습니다. 깊은 산골 어느 선술집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노래 대결을 그린 이 단편은, 요컨대 굉장히 지루합니다. 장황하기 짝이 없죠. '이게 정말 명작이라고?'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작가 조지 손더스의 생각은 다른 모양입니다. "볼 때마다 감동하게 된다"며 치켜세우죠. 그는 2017년 부커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는 '막춤'의 비유를 들어 이 작품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춤을 추는 동안 에너지 출력을 측정하는 계측기를 손목에 차고 있고 목표는 '1000단위의 에너지 발산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달성하지 못하면 누군가 당신을 죽인다. 당신에게는 춤을 추고 싶은 방식에 대한 어떤 생각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추면 에너지가 50 정도에 머문다. 마침내 간신히 에너지를 1000 이상으로 올리고 거울을 흘끗 보니 세상에, 이게 춤인가? 춤을 추고 있는 게 나인가? 하지만 당신의 에너지는 1200이며 계속 올라가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계속 그렇게 춤을 출 것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비웃을 때는 이런 기분일 거다. '그래, 좋다, 마음대로 웃어라. 내 춤이 완벽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가 죽지는 않는다.'“

그에게 이반 투르게네프는 누군가에겐 막춤으로 보일지언정 필요한 에너지를 기어코 만들어 낸 작가인 셈입니다.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밟히지만 경지에 이른 아름다움이 이 작품 속에 있다는 것이죠. 손더스는 그러면서 "이야기에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집어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면 어떤 방법으로든 얻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는 일상 생활에서 은근히 써먹을 데가 많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이를테면 난해한 현대미술 작품이라든지, 스페셜티 커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때 유용합니다. "이 작품, 언뜻 투박하고 형편없어 보이지만 나에게는 경지에 다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마치 19세기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가 쓴 <가수들> 같달까? 미국에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손더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하고 말입니다. 물론 여러 번 쓸 수는 없겠지만요.

얼마 전 저는 고향인 서울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삶을 가꿨던 터전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할아버지는 홀로 제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제 삶의 목표이자 전부인 존재였습니다. 제가 하려는 작업은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극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삶의 목표를 찾으려는 시도랄까요?

꽤 오래 준비한 일이고 나름 자신도 있었지만, 역시 피부에 닿는 현실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커피로스팅, 서비스기획, 웹개발, 그래픽 디자인, 철거, 인테리어, 브랜딩.. 해야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것저것 손을 대다보니 계속 제자리만 맴도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얼마 전부터는 카페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신문기자에서 스타트업 개발자로 이어지는 제 이력은 겉보기엔 꽤나 화려하지만 이쪽 세계에선 번번이 퇴짜입니다. 그럴 때면 '이게 정말 맞나'라는 회의감에 빠지기도, "그냥 돌아와서 기자일이나 하라"는 기자 친구들의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제가 찾은 방법이 바로 '막춤'입니다. 지금의 내가 막춤을 추고 있다고, 이반 투르게네프의 <가수들> 같은 작품을 쓰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죠. 누군가의 눈에 내가 추는 춤이 형편없어 보이더라도, 때로 비웃음을 살지 몰라도, 아랑곳 않고 필요한 에너지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에너지 1000을 넘길 지도 모를 일입니다. 쉽진 않은 일이겠지만요.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이 있다면 저는 막춤을 권하고 싶습니다. 해보세요. 진짜 춰보는 것도 좋겠지만 상상만 해도, 꽤 쓸모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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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 한 잡지사로부터 기고를 요청받아 넘겼던 글이 이제서야 나왔다. 그쪽에선 몰랐겠지만 공교롭게도 대학시절 처음으로 내 글을 실어준 바로 그 잡지였다. 아무튼 아주 잠시지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월간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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