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마감하는 일은 늘 괴롭다. 내용이 뭐가 되었든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 마찬가지다. 번역가 안은미씨가 엮은 <작가의 마감>(2021)이란 책을 보면 나쓰메 소세키나 다자이 오사무 같은 20세기 초반 일본 작가들 역시 사정이 비슷했던 것 같다.
내가 가난한 가장 큰 이유는 글 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로 시작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나의 가난 이야기>(1935)를 보면, 마감이란 것이 얼마나 갑갑하고 지리하며 괴로운 일인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원고지 한 장을 쓰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뜨거운 차를 마시고, 소변을 보고, 원고를 노려보고, 다시 소변을 보고, 정원을 어슬렁 대고, 담배를 피우고, 원고를 노려보다가 바닥에 드러누워 한 시간쯤 천장을 응시한다. 1시간이 주어지면 글 쓰는 시간은 10분 남짓. 나머지는 뒹굴대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런 대단한 소설가가 아니고 그렇게 대단한 글을 쓰려는 것도 아니지만, 가슴 밑바닥 답답함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마감이란 놈은 그다지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다 불현듯 <작가의 마감>을 펴게 된 것도, 올해 1분기 읽은 책들을 헤아려 보게 된 것도 모두 다 마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모두 마지막 장까지 읽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짧게 한줄평을 달아봤다.
- 사회학의 핵심 개념들, 앤서니 기든스, 필립 w. 서튼 :
사회학의 클래식. 꼭꼭 씹어먹으려다가 체하고 말았다.
- 문학비평 용어사전, 이상섭 :
다 읽는 데 성공하면 분명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 농담, 밀란 쿤데라 :
중세에 유행했을 거 같은 연극을 한편 본 느낌. 큰 감흥이 없었지만 그 시절 봤다면 뭔가 달랐을지도.
-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무라카미 하루키 :
이 책을 읽으며 여행을 가고 싶어졌고, 실제로 다녀왔다.
-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무라카미 하루키 :
이 아저씨, 왠지 실 없는 옆집 아저씨 같다는, 실 없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
- 굿바이 편집장, 고경태 :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장인정신'이 아닐까. 까다롭고 예민하며 집요하다.
- 예술판독기, 반이정 :
쉽지만 어려운, 어렵지만 쉽게 쓴 글. 이 책을 읽으면 글쓰기에 있어 어떤 '경지'가 존재함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
- 도그냥의 서비스 기획 스쿨, 이미준 :
조직에 이런 선배가 있다면, 꽤 행복하게 다닐 수 있을 텐데..
-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동진 :
영화 <밀정>의 원작격 논픽션. 저자인 선배한테 물어보니 진흙밭에서 '김상옥'을 건져낸 건 우연에 가까웠다.
- 첫문장의 힘, 샌드라 거스 :
이 책이 말하는 바는 일단 첫문장으로 낚고, 중반까지도 낚고, 끝날 때까지 낚으라는 것이다.
- 시점의 힘, 샌드라 거스 :
'3인칭 제한적 시점(인물 시점)'이란 것의 존재를 35년 만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1분기 최고의 책.
- 묘사의 힘, 샌드라 거스 :
읽는 동안 조지프 퓰리처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을 쓰든 짧게 쓰라. 그러면 읽힐 것이다. 명료하게 쓰라. 그러면 이해될 것이다. 그림 같이 쓰라. 그러면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
- 생각에 관한 생각, 대니얼 카너먼 :
Chat GPT가 한창 난리일 때 재미삼아 "최고의 논픽션을 추천해줘"라고 물었다. AI가 첫손에 꼽은 것이 이 책이었다. 이견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