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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Mar 01. 2017

변신(프란츠 카프카) - 여전히, 변신

소설 읽고, 독후감


1.

 사람의 가치는 그 존재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혹자는 모든 사람이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존엄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를 지님은 불가능하며 측정할 수도 없다. 모든 인간은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존재 가치는 오로지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된다. 넓게는 그가 살고 있는 국가부터 좁게는 자기 방과 신체적 외형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의미와 가치는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외적 조건에서 비롯되며 또 그로 말미암아 평가된다. 때문에 사람 개인의 가치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판단된다고 볼 수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이처럼 사람 개인의 가치란 주변과의 관계에 의해 설정될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이를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를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시키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동시에 그가 연결되어 있었고, 또 끊어진 당시의(그리고 지금의) 사회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보여준다.


2.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변신>의 첫 문장이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불안한’ 꿈에서 깬 그레고르는 꿈보다 잔혹한 현실과 마주한다. 꿈은 제 아무리 불안할 지라도 스스로가 주인공인 공간이지만, 현실은 온전한 자신은 없고 타의에 의해 스스로가 설정되는 잔혹한 공간이다. 그런 현실에서 그레고르는 해충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그간 유지해온 주변과의 연결고리가 모두 끊겨버린 것이다. 

벌레로의 변신은 곧 완전한 단절이다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 상황을 인지한 뒤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데, 걱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더욱 잔혹하다. 그는 해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계를 주시하며 회사 지각을 염려한다. 어떻게든 출근하기 위해 몸을 움직여보려 애쓴다. 그가 처음 해충이 된 자신을 마주한 뒤 걱정하고 고민하는 대상은 해충이 된 자신이 아니다. 그로 인해 다가올 사회적 관계의 단절과 경제적 능력 박탈, 그리고 가족의 생활고다. 그레고르가 현실에서 그리는 불안한 꿈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자신이 처한 실태 자체를 배제한 이 같은 걱정은, 그가 스스로의 가치를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레고르가 자신의 가치를 외부로부터 찾고, 그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다음 이어진 지배인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그레고르는 해충이 되었음에도 어떻게든 지배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연실색한 지배인과 가족들 앞에서 그는 당당히 서류를 챙겨 출근하겠노라 외친다. 이는 ‘그레고르 잠자’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스스로에게서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레고르가 생각하는 ‘그레고르 잠자’의 정체성은 ‘가족의 생계를 담당해야 하는 충직한 외판원’이므로, 그 밖의 다른 변경사항은  자신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요소였기 때문이다. 설사 외견이 벌레가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3.

 가치의 외면화와 타의적으로 형성된 정체성은 현대 사회 청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시대 청년들에게는 꿈이 없다. 당장 인생의 목표가 취직인 청년만 부지기수다. 몇십 개나 되는 원서를 쓰고 어디든 조건만 맞으면, 붙여만 주면 들어간다. 눈앞의 현실에 맞춰 살아가기도 버겁다. 선배 세대는 이들을 두고 ‘낭만이 없다’, ‘도전 정신이 없다’고 힐난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비판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가치관과 정체성은 그를 둘러싼 사회 속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역으로 말하면,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기능적인 존재로서 삶을 선택한 대한민국 청년의 모습이 곧 현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른바 ‘무한 경쟁’이라고 하며 비교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온전한 정체성을 정립하기는 힘들다. 자기소개서를 기계처럼 써서 바치지만, 이 역시 상대가 봐주었으면 하는 나를 선택 취합한 것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그레고르를 찾아온 지배인에게 그의 어머니가 자기 자식이 얼마나 재미없고 폐쇄적인 삶을 살고 있는 기계적 인간인지를 열변하며, 자르지 말아 달라 애원했던 것과 같이 말이다.

우린 젊을 뿐이다


4.

 스스로를 그 자체로 보지 못했던 그레고르는 완전한 벌레가 되어 외형과 신체 능력뿐 아니라, 언어 능력마저도 박탈당한다. 완전한 고립이지만 한 편으로는 드디어 독립적이고 고유한 ‘그레고르 잠자’로서 세상 위에 설 기회를 얻은 셈이기도 하다. 비록 끔찍한 형상이긴 하지만 인간 사회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허락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끝내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족은 오랜 기간 그의 존재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가치와 정체성을 주변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정립하는 이에게 사회로부터의 독립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러한 자유의 제공은 형벌이나 다름없다.

 반면 그레고르의 가족은 입장이 다르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기존에 집안의 돈벌이를 담당하며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보좌해주던 그레고르는 끔찍한 해충으로 변신해 사회와 단절되었다. 그레고르 없이 살아남기 위해, 그들 역시 변신을 해야 한다. 그들의 변신은 그레고르의 것과 정반대로 진행된다. 가족 구성원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로 뛰어든다.


5.

 <변신>에서 주로 삼는 ‘사회적 관계’란 전적으로 경제적 능력에 기반한다. 변신의 등장인물들이,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란 말 그대로 ‘자본’이 주가 되는 사회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사회와의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낙오한다. 낙오하는 인물은 그 순간부터 그가 속한 사회와 집단에 해가 되는 존재가 된다. ‘해충’이다. 그럼에도 최후의 순간까지 그 해충을 보듬어줘야 한다고 믿어지는 최소한의 집단이 바로 가족이다. 소설 속 그레고르의 가족들 역시 처음에는 그리 믿지만, 점차적으로 각자 경제적 능력을 얻고 그레고르에게서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게 되자 태도가 바뀐다.  

최후저지선, 가족

 가장 극적으로 바뀌는 인물인 누이동생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가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소설 초반부에서 그녀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그레고르와, 그를 찾아온 지배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방에서 홀로 훌쩍인다. 열쇠 기사를 불러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에는 바로 뛰어나갈 정도로 순종적이다. 하지만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식사와 관찰을 담당하게 된 이후 그녀는 변한다. 그레고르를 돌보고 그에 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가족 내 유일한 인물이라는 지위(관계)가 그녀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가족들이 그녀에게 설정한 가치 역시 변하게 된다. 발언권이 생긴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며 그레고르의 방을 정리한다. 이윽고 점원 자리를 얻으며 경제적 능력까지 획득한 누이동생은 드디어 진정한 사회인이 된다. 그리고 ‘해충’이 되어 경제능력을 상실해 사회인의 지위를 박탈당한 그레고르의 가족 구성원 퇴출을 가장 강경하게 주장하기에 이른다. 기능을 상실한 오라버니를 완전히 대체한 그녀를 부모는 예쁘게 성장했다 생각하며 흐뭇하게 바라본다. 


6.

 한편 ‘아버지’라는 존재는 소설에서 시종일관 굉장히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라 함은 묵묵히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며 은근하지만 깊은 사랑을 베푸는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나 <변신>의 아버지에게서는 (적어도 그레고르에게)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그레고르가 멀쩡할 때는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집에서 쉬는 유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더욱이 그레고르에게는 사업 실패로 인한 빚까지 넘겨주는 등 쓸모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해충이 되어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자 그 직후부터 그를 혐오한다. 이후 자신이 은행 사환으로 취직해 경제권을 다시 얻게 되자 그는 근엄하고 위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되찾는다. 깔끔한 제복을 입고 “이것이 인생이로구나, 이것이 내 옛 시절의 평화로구나!”라고 외치는 그는 일견 잔인해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그레고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소설에서 아버지는 경제 능력을 가진 자만이 주변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 논리를 누구보다 철저히 지키는 인물이다. 듬직하게 자식을 보듬어줘야 할 ‘아버지’라는 존재가 이를 상징하기에 더욱 충격적이다. 하지만 일명 ‘효도 계약’과, ‘재산이 있어야 자식에게 대접받는다’는 등 부모 자식 간의 신뢰가 돈으로 연결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보면, ‘아버지’라는 존재와 ‘가족’이라는 가치 역시 ‘자본’과 분리할 수는 없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7.

 ‘변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산업에서 가장 잘 팔리는 소재 중 하나다. 인기 있는 슈퍼히어로들은 하나 같이 변신을 한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 맨 등, 모든 히어로들은 일상 속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는 변신을 하고 대중 앞에 멋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히어로들의 변신에는 한 가지 아이러니가 있다. 바로 변신을 통해 스스로를 숨기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화려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다. ‘변신’이라는 소재가 잘 팔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맨’들은 자신만의 유니폼과 가면을 착용하고 고유의 개성을 발산한다. 그리고 그러한 개성 있는 유니폼과 가면은 곧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가면 속 그들의 맨얼굴은 사실 주변과의 관계에 의해 형성된 가짜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들은 일상에서 그저 회사원이고, 사진기자이거나, 잘 나가는 CEO로 여겨질 뿐이지 않은가? 가면과 유니폼 ‘속’이 아닌 ‘겉’의, 이 특이한 모습이 바로 진정한 그들 자신의 모습이며 진정한 정체성이다. 현대인이 가장 바라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 가짜의 나를 벗어던지고 진짜의 나를 뽐내고 싶다는 소망을 정확히 읽어 냈기에, 미국의 슈퍼 히어로들은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를 날아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알록달록

  카프카가 포문을 연, 현대인의 자아를 찾기 위한 ‘변신’의 도전은 2017년 지금에 이르러서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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