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돌아보기
1.
내가 지금의 ‘나’가 되기까지, 우리는 어떤 과정들을 거쳐 왔을까? 과거의 수많은 '나'들은 2017년 오늘의 내가 어떠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까? 168분 12년의 긴 여정을 석양과 함께 마친 뒤 잠시 여운에 잠겼다. 내 소년 시절을 돌아보려 시도해 봤다. 한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항상 가슴 한 구석에 담아두고 종종 꺼내보던 상투적인 기억들만 떠오른다. 분명 여러 가지 만남, 이별, 대화를 통해 내가 형성되었을 텐데, 지금 와서 기억에 남은 건 특별한 사건이나 장면들뿐이다.
2.
<비포 3부작>으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영화 <보이후드>는 무려 12년간, 1년에 12분씩 같은 배우를 출연시키며 찍은 영화다. 영화의 소년 소녀들은 리얼타임으로 성장하며, 어른들은 실시간으로 늙어간다.
러닝타임이 168분이나 되는 이 영화는 꽤나 지루하다. 주인공 꼬마가 20살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떤 식으로 성장해 가는지, 삶을 그저 담담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삶의 전환점이 되는 큼직한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관객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 덤덤히 흘러가는 성장 과정의 일부로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여느 성장 영화와는 달리 '성장의 계기'가 없으니 주인공의 '성격, 태도의 전환'도 없다.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기교를 부리지 않으니 영화로서 재미도 없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게 진짜 '성장'이다.
3.
우리는 가족과 학교를 거쳐 성장기를 통과하는 과정을 ‘사회화’라는 단어로 심플하게 정의 내린다. 하지만 막상 그 내용이 세세하게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큼직한 몇 가지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때 그 사건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지"하고 읊조릴 뿐이다. 물론 큼직한 사건들은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거나, 혹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평생토록 기억에 새겨지게끔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성장 과정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는 것은 무수히 많은 일상의 순간들이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치원 시절 선생님과의 ‘참새 짹짹’ 같은 대화나 초등학교 때 급식소에서 줄을 기다리며 친구들과 나눈 잡담들, 엄마와 장을 보러 가며 나눈 대화들이 알게 모르게 쌓이고 쌓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보이후드>가 12년간 같은 배우와 함께 담아내고자 한 '성장'은 바로 이런 '특수하지 않던 일상들의 집합'이다.
4.
수년 전 해외에선 ‘1일 1초 비디오’를 찍자는 운동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매일의 일상을 동영상으로 틈틈이 남긴 후, 그중 하루를 대표하는 1초의 순간만을 골라 저장하는 습관을 들이자는 게 모토다. 하루 1초씩 꾸준히 1년을 찍으면 다음 해 1월 1일에는 나의 작년을 365초의 파편적인 순간의 모음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차곡차곡 촬영해서 10년 뒤, 3650초로 압축된 나의 10년을 돌아보면 무척이나 감회가 새로울 터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부터 나도 한 번 시도해 볼까? 거창하게 동영상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줄 일기 정도만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알게 모르게 쌓여 미래의 나를 만들, 앞으로 있을 일상의 순간들을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