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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Nov 04. 2018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1권 서평

미워할 수 없는 춘수 아저씨

1.
 뭐랄까, 한 마디로 하루키식 자기 복제 작품 라인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기 복제작 계보를 따지자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 - <태엽 감는 새(1994)> - <해변의 카프카(2002)> - <1Q84(2009)> - <기사단장 죽이기(2017)> 정도 되려나? 비문학까지 포함하면 <언더그라운드(1997)>까지. 물론 하루키는 굉장히 다작을 찍어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저 작품들 사이사이에도 꽤 많은 작품들이 있다. 다만 하루키가 1985년 이후 꾸준히 유지해 온 한 가지 틀, 하루키 월드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를 담아낸 ‘대표 장편’이 저 작품들이라는 것.

2.
 위 작품들은 일관성 있게 ‘겉’이 아니라 ‘속’에 숨어 있는 그 어떤 것을 보여주려 한다.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그것’은 세상 한 구석, 아주 깊은 곳에 남몰래 숨어 있다. 일상을 벗어난 위치에 있는 ‘그것’의 존재를 현실성 있게 증명하긴 불가능하다. 때문에 위 하루키 작품들은 이른바 남미식 ‘마술적 리얼리즘’ 형식을 따른다. ‘마술적’인 요소들이 없이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현실이 설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술’이 현실 위에 놓였을 때만이, 비로소 어둠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그것’이 지상 위로 올라온다.  하루키 월드 속 배경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엇’을 현실에 등장시키기 위한 거대한 무대 장치라는 하나의 목적을 유지한 채, 20여년간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했다. 그 세계는 뇌 속의 세상일 수도, 도쿄 지하 속 숨겨진 세계일 수도, 우물 속일 수도, 무거운 돌이 뒤집어진 이후의 세계일 수도, 혹은 달이 두 개가 떠 있는 세계일 수도 있다. 이 책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그 세계는 의문의 방울 소리가 들리는 숨겨진 석굴이 마침내 열린 이후의 세계, 이데아로서의 기사 단장이 떠다니는 세계다.

3.
 하루키는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설명 ‘할 수 없다’. 하루키 역시 ‘어둠 속 그것’을 명확하게는 모른다. 그것의 형태가 어떠한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하루키는 알지 못하고 따라서 설명해 줄 수 없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 분명히 존재하며, 현실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분명하다. 존재하지만 생김새도, 성격도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을 그려내려는 하루키의 소설들은 대체로 추상적이며 환상적이다. 그림으로 치면 소설 속 ‘기사단장 죽이기’ 같은 은유적 회화일 수도 있고, 혹은 ‘추상화’일 수도 있겠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의 형상을 대체 어떻게 빚어 낸단 말인가?
- P.11



4.
그런 의미에서 이번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는 예전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직접적이다. 주인공은 화가이며 생계 수단으로 그리는 그림은 ‘초상화’이지만, 본인이 그리길 좋아하는 그림은 ‘추상화’다.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일반적인 ‘그림(초상화같은 것)’은 ‘겉’을 재현할 수는 있지만 ‘내용물’은 설명할 수 없다.


그림쟁이니까 음식의 모양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있어. 하지만 내용물은 설명할 수 없어.
- p.494


반면 추상화는 그림 자체가 이미지의 구체성을 파괴시키고 철저히 추상성을 살린 그림이다. 대상을 추상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대상의 외면 아래 숨겨진 그의 ‘내용물’을 파악하는 일이다. 추상화를 그리는 작업은 ‘조각’과 같다. 조각가들은 외견 상 거대한 돌덩이에 불과했던 것을 한동안 바라보고, 그 안에 숨어있는 이미지, 즉 ‘본질’을 찾아내어 돌덩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마찬가지로 추상화 역시 대상의 외견을 깎아내고 그 안에 숨겨진 대상의 본질을 캔버스 위로 옮기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화란, 위 대사를 조금 바꿔 설명하자면, 모양의 재현은 어느 정도 포기하더라도 ‘내용물’을 설명할 수는 있는 그림인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관 그 자체다.

5.
 주인공은 초상화를 업으로 삼고 있지만 ‘추상화’의  작업 양식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대상의 본질을 최대한 많이 담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과거 하루키 본인이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 사건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 했던 것(<언더그라운드>, 1998)처럼, 주인공 역시 초상화 의뢰인들의 출생연월부터 출생지, 삶 전반적인 것들을 모두 꼼꼼히 들은 후에야 붓을 든다. 그에게 직업으로서의 ‘초상화’는 현실과 적절히 타협한 자신만의 ‘추상화’다. ‘추상’의 내용물을 담되, 모양의 재현에 초점을 둔 ‘초상’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과 일상은 어느 날 이웃에 이사온 ‘멘시키 씨’를 만나며 깨진다. 멘시키 씨는 주인공에게 초상화를 주문하지만, 그는 좀처럼 내면 파악이 되지 않는 멘시키 씨를 어중간한 초상화로 옮길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의 초상을 완전히 추상화시킨다. 자신도 그 추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멘시키 씨의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캔버스에 알맞게 옮기려면 추상화 이외에는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때맞춰 저택 옆 숨어있던 ‘석굴’을 열고 ‘기사단장’의 형상을 한 ‘이데아’를 세상에 풀어놓는다. 멘시키 씨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환상’과 ‘추상’으로서의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6.
 1권은 1권답게 적절한 떡밥들을 쭉 뿌려 놓고,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알맞게 호흡을 끊는다. 재밌게 읽었다. 2013년 출간했던 1권 짜리 장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 순례의 해>에서는 하루키가 너무 친절해지고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다소 아쉬웠는데(그래도 좋긴 좋았다... 어쩔 수 없는 하루키 빠 인정?), 이번 신작을 읽으니 다시 초심(?)을 찾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역시 하루키는 2권 이상 짜리 장편을 써야 제 맛이 나는 것 같다.


그렇게 지하의 석실을 열어버림으로써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무언가를 얻었을 겁니다. 과연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 p.297








P.S) 올해 초 네이버 블로그 ‘스마트롱’s 문화읽기’에 게재했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P.S2) 가물가물합니다만 2권은 1권보다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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