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까먹기 전에 빨리 써야해!!
12월 말 부터 1월 중순 까지 방학이다.
매일매일 아기를 보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데, 이 와중에 난 집안일도 안하고 오롯이 아기만 "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돌보나? 그냥 쳐다보나? 양심에 손을 얹고 대답을 하자면 그냥 쳐다 "보는" 쪽이 더 가까운거 같기도 하다.)
시어머니께서 다른 집안일, 청소, 요리 다 하시는데 내가 못된 며느리는 아닌거같은데도 잘 안도와드리게 된다. 도와드리겠다고 해도 "응 애기나 잘 봐~" 짧고 쿨하게 넘겨버리시는 시어머니. 그래도 내가 더 도와드린다고 해야하는게 맞는건데, 난 그렇게 하지 않는다 ...
근데 오늘은 시어머니가 감기때문에 머리도 아프시고 목소리도 잠기셨다. 이 와중에 집안의 다른 식구들 빨래를 하시는데, 정말 내가 오늘은 빨래라도 도와드려야겠다 하고서 빨래방에 가서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개기 시작했다.
빨래방에는 세탁기랑 빨래 건조기가 나란히 있다. 처음에 미국 왔을땐 전기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다는 빨래 건조기가 너무 흔하게 여기저기 있어서 (처음 살던 아파트 공동 빨래방에도, 고모 댁에도, 학부시절 낡은 기숙사에도 ... 집집마다 곳곳마다 사람 사는곳이면 세탁기 & 건조기 콤보가 늘 있다) 문화충격이었던 기억이 난다.
작년 말 한국에 놀러가서 지내는 곳에 빨래 건조기가 없는거 보고선 또 문화 역 충격을 한번 더 경험했지만. (빨랫대에, 집안 가구 여기저기에 빨래 말리던 모습도 이젠 잔잔한 추억 ... 남편도 이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립지는 않을거라고 하면서 ... ㅋㅋㅋ)
다른 식구들 빨래 하는거, 개는거 몇번 도와드리고 (그래봤다 세탁기랑 건조기가 일을 다 하지만), 식구들 침대보 가는것도 시어머니랑 같이 하고나서 내 빨래도 해야겠다 싶어서 슬슬 돌려 놓았다. 남편도 일 끝나고 와서 아기 보는걸 도와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다 된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 건조기에 돌렸고, 또 시간이 지나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슬슬 개기 시작할 무렵.
아기랑 남편이 집안을 뛰어다니며 잡기놀이를 시작했다. 보통 아기가 도망가고 남편이 쫓아오는 역할인데, 아기의 종종거리는 뜀박질에 남편이 과장스러운 걸음걸이로 속도 맞춰주면서 돌아다니는 게 꽤 귀여운 풍경이다. 여기까지는 평소랑 별 다를바 없는 익숙한 모습.
그런데 오늘은 아기가 빨래방에 있는 날 보고 내게 왔다.
꼭 동요에 나오는, 숲속 작은집 창가에 서있던 작은 아이가 토끼를 숨겨주는 모양처럼, 아기가 내 뒤로 와서 꼭 숨었다.
(숲속 작은집 창가에, 작은 아기가 서있는데,
토끼 한마리가 뛰어와,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나를 숨겨주지 않으면 포수가 와서 빵! 쏠거에요!"
작은 토끼야 이리와, 편히 쉬거라.)
비록 우리가 있는 공간은 세탁기 한 대, 건조기 한 대 있는 작은 빨래 방이었지만, 나에게 그 순간만큼은 꼭 저 위 제목 부분에 있는 예쁜 빨랫줄 배경 마냥 예쁜 공간에서 펼쳐지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아기 뒤를 남편이 성큼 성큼 따라와서는 아기 찾는 시늉을 했다. "Baby, where are you??"
아기는 내 뒤에 꼭 숨어있었다. 따뜻하고 큰 스웨터 하나를 막 건조기에서 꺼내 서있는 아기 머리 위에 얹어 놓아 아기를 숨겨줬다.
여기에 내가 또 한국말로 "여기 아기 없어요! 아기 여기 없어요!" 하니까 남편은 곧잘 알아듣고 다른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척을 했지).
아빠가 갔나, 내 스웨터 뒤로 고개를 빼꼼히 들고 살피는 아기에게 "아빠 갔다! 아기도 이제 아빠 따라가봐!" 했는데, 아기가 빨래방에서 안떠나고 계속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 사이에 남편이 집안을 한바퀴 돌고 다시 빨래방으로 왔다. "Is the baby here?"
난 또 다시 "아기 여기 없어요! 아기 저기로 갔어요!" 하고 손짓 하니, 남편이 또 그쪽으로 갔다.
아기는 다시 내 스웨터 속에 숨어서 아빠가 갈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아빠가 간 것을 확인한 아기가 스웨터는 그대로 걸친 채로 빨래방 안에서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남편이 슬슬 다가와서 "얘 이제 숨는거 신경 안쓰는거같은데?"라고 작게 (엄마인 나만 들리게) 말했다.
내가"아니, 아직 숨으려고 하는거 같은데" 라고 말하려는 찰나, 남편이 빨래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고,
갑자기 나타난 아빠를 본 아기는 깜짝 놀라며 이 영화같은 한 장면은 끝이 났다.
나중에 아기가 크면 아빠랑 더 재밌게 놀려나? 스릴 있게 놀아주는건 아빠가 엄마보다 더 잘 하는거 같은데.
그래도 뭐 필요한거나 고민거리가 있으면 엄마인 내게 와서 언제든 숨을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었다 가면 좋겠다.
지금은 한없이 귀여운 아기인데. 어린이가 되고 성장기, 사춘기 겪으면서 엄마 속을 많이 썩이려나? (난 울엄마에게 늘 착한 딸이었던거같은데 ... 우리 남편두 시어머니께 늘 착한 아들이었구. 그 복이 되돌아오지 않으려나?)
+ 제목 부분에 있는 사진은 getty image bank 에서 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