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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이트 Jan 08. 2024

시절인연

눈과 함께 찾아올 너를 기다리며.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하얀 눈으로 반짝거린다.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발을 떼는 사람들과 속도를 늦춰 움직이는 차를 보니 밤새 내린 눈이 야속하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가족의 안부가 궁금하고 보도되는 이런저런 사고 소식에 걱정스럽다. 그래도 햇빛에 반짝이는 눈이 예뻐 저절로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눈은 두렵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눈이 내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9년 전, 친구와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친구는 딸이 3살 때 다녔던 놀이학교에서 만난 아이의 엄마다. 집도 가깝고 둘 다 외동딸을 키우다 보니 공감대가 많았고 금방 친해졌다. 나와 친구는 성격도 다르고 육아 방식도 완전히 달랐지만 서로의 가치관과 생활을 존중하며 우정을 쌓았다. 엄마도 아이도 둘도 없는 친구가 됐고 하루가 멀다고 만났다. 다른 지역으로 같이 이사도 했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단짝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다른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었고, 아쉬운 마음에 여행을 계획했다. 우린 겨울의 제주도를 보며 추억을 만들기로 했다.

 

출발하는 날, 제주도는 대설 특보 예보가 있었다. 눈이 와봤자 얼마나 오겠냐며, 우린 오히려 색다른 겨울 제주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거라며 들떴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날씨가 정말 좋았다. 눈이 온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하늘은 청명했고 춥지도 않았다. 차를 렌트하고 여유롭게 바닷가의 한 카페를 갔다.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제주도가 선사하는 여유는 행복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할 만큼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겨울 제주도를 만끽하고 있는데 예보한 대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파랗던 하늘은 검정 물감을 풀어놓은 듯 점점 어둡게 변했고 눈발은 바람과 함께 더욱 거세졌다. 어두워진 하늘만큼이나 걱정이 몰려왔고 우린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운전을 시작하자마자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렸다. 호텔까지는 1시간이 걸리는데 눈은 벌써 도로를 덮었다. 운전대를 잡은 친구는 무섭다며 온 신경을 집중해서 운전했다. 걱정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안고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앞에 있던 차가 비상등을 켜며 멈췄다. 앞 상황을 알 수 없는 우리도 차를 세웠다. 반대 방향에서 내려오던 차가 창문을 내리고 우리를 향해 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친구가 창문을 내리자, 운전자가 소리를 질렀다.

 

“지금 도로가 미끄러워서 차들이 못 올라가고 있어요. 미끄러진 차끼리 사고도 나서 위험해요. 빨리 유턴해서 내려가요. 다른 도로로 가세요!”

 

덜컥 겁이 났다. 아이들은 무섭다며 소리를 질렀고, 친구는 안절부절못했다. 운전 경력 10년 차인 친구가 무섭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대를 잡으니 나 역시 무섭고 긴장됐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운전을 시작했다. 그 사이 눈은 더 쏟아졌고 시속 10km로 운행하는 것도 버거웠다. 눈으로 덮인 도로는 두려움으로 가득했고 더 이상 운전이 불가능했다. 나는 도로 옆에 차를 세웠다. 우리 차 옆으로 차들이 계속 지나가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은 뒷자리에서 옷을 뒤집어쓰고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보니 빨리 호텔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점점 날은 어두워지니 밤이 되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게 뻔했다.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도로로 나와 스노체인을 꺼냈다. 생전 처음 보는 스노체인. 실물을 본 적도 처음인데 체인을 끼워야 한다니 난감했다. 어쩌겠는가. 우린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체인을 꺼냈다. 체인은 생각보다 무거웠고 바퀴보다 컸다. 설명서에 나온 모양과 완전히 다른 제품이었다.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렌터카 회사에 전화해서 따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제품을 검색해 겨우 체인을 걸었다. 친구와 나는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손이 꽁꽁 어는지도 몰랐다. 이제 안전하게 운전만 하면 호텔에 도착할 것이다. 다시 시동을 켜고 운전했다. 체인을 장착한 차가 마치 마법을 부려 우리를 안전하게 호텔까지 데려가 줄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됐다면 큰 소리로 함성을 질렀고, 아이들은 뒤에서 “엄마 멋져!!”라며 기뻐했다. 비록 시속 10km의 속도였지만 차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바퀴가 돌아가면서 뭔가 치는 소리가 났다. 밖은 어둠의 그림자로 덮이기 시작했고 차 안은 알 수 없는 소리로 공포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고민할 시간도 없이 난 차를 세워야 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천천히 차가 없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차를 세우자, 소리가 멈췄다. 혼자 차에서 내려 바퀴를 살폈다. 이런! 왼쪽 바퀴의 체인 줄 하나가 빠져 있었고, 줄이 운전석 문을 치면서 내는 소리였다. 바퀴와 크기가 맞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차 문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난 체인을 끼워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들어가지 않았고 손이 너무 아팠다. 그 상태로 운행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6시가 넘어가면서 점점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은 호텔까지 20분이 남았다고 알려줬고, 아이들은 옷을 뒤집어쓰고 이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나와 친구는 아이들이 더 두려워할까 애써 태연한 척 여유를 부렸다. 두려운 건 엄마인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난 “엄마는 위기에 강하다”라는 말이 마치 선험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렇게 앞차의 불빛에 의지해 어둠과 체인 줄이 내는 마찰음의 두려움과 싸우며 차는 호텔을 찾아 애써 달렸다. 드디어 호텔의 희미한 모습이 보였다. 나는 “호텔이다!”라며 기쁨과 울분이 섞인 소리를 뱉어냈고 친구와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호텔 앞에 차를 세웠고 직원이 뛰어나왔다.

 

”손님, 어떻게 오신 거죠? 사고 안 나셨나요? 이렇게 도착한 건 기적입니다. 예약자 대부분이 못 온다는 연락이 왔는데 사고 없이 오셨다니 하늘이 도왔네요. 대단하세요. “

 

직원의 말에 힘들었던 시간은 사라졌고 왠지 뿌듯함에 웃음이 났다. 마치 전장에서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살아 돌아온 영웅이 된 것 같았다. 체크인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박수가 나왔다. 누구 할 것 없이 침대로 뛰어 들어가 뒹굴었다. 우린 이전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된 것처럼 서로 얼싸안았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보답인 듯 다음 날부터 제주도는 더없이 맑고 투명한 하늘을 선물했다. 우린 3박 4일 동안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며 행복했다.



 

여행 이후 나는 딸의 중학교 입학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거리가 멀어지니 만남이 뜸해졌고 교육환경이 다른 아이들은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그래도 나와 친구는 시간을 내서 가끔 만났고 우정도 변함없었다. 2년 전, 아이들의 대학 입시로 소식이 뜸해졌다. 서로 눈앞의 중요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딸이 대학교에 입학하고 친구의 딸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친구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친구는 딸이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를 시작했다며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재수하며 힘들어하는 딸이 안쓰러워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딸은 공부하느라 힘든데 자신이 친구들을 만나 웃고 떠드는 것이 용납이 안 된다는 거였다. 친구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딸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아련하게 전해졌다. 친구는 나중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통화하자며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지났고, 난 여전히 친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때가 있어서 만날 사람은 애쓰지 않아도 만난다고 한다. 가끔은 전화해서 친구의 상황을 묻고 싶다. 힘들면 위로하고 기쁜 일이 있다면 축하해 주고 싶다. 그러나 이것도 내 욕심이다. 친구는 기쁜 소식이 있다면 나에게 바로 연락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줄 거라는 걸 알 것이다. 

언젠가 밤사이 예고 없이 내린 눈처럼, 친구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전화할 거다. 우린 누구보다 소중한 추억을 나눈 사이니까. 아마 전화를 받는 날도 예쁜 눈이 내리지 않을까. 그날은 내리는 눈이 야속하지도, 걱정되지도 않고 더없이 사랑스러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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