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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Jun 17. 2022

오징어 게임 그 시절로~

백 투 더 차일드 후드. 1

네이버는 2012년 8월에 공지사항, 채팅, 사진첩, 투표, 동창찾기 등의 기능을 제공하는 '밴드'를 출시한다. 출시 당시에는 큰 반응이 없었지만 동창찾기 기능으로 초·중·고 동창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자 젊은 층보다는 40~50대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중년의 SNS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졸업 도를 알면 직접 찾아 가입할 수도 있고 초대 형식으로도 가입할 수 있어 많은 중년들이 '밴드'덕에 새로운 모임을 갖게 된다. 제2의 '아이러브스쿨'이 된 셈이다.


청소년 사이의 동아리나 반모임, 대학 내 스터디나 각종 동호회 모임도 '밴드'에서 성사된다. 가족 모임을 알리거나 여행 사진첩으로도 활용도가 높으며 관심 분야의 '밴드'에 가입하면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노안과 뱃살에 굴복한 채 주름의 덫에 걸려 허우적거릴 즈음이다. 삶의 한 시기를 오롯이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네이버 밴드'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지나가버린 열세 살을 손흔들어 불렀다. 솜털 보송한 열세 살 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가 순서없이 출력되어도 마치 자신의 추억인 양 저마다 한두 마디씩 보태는 호들갑에서 어린 날의 너와 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끝내 지우지 못한 한 줄기 기억을 잡고 까마득히 멀어져간 시간을 향해 되감기는 필름처럼 거슬러 올라야 했다. 저들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지만 우리의 시간은 열세 살에 멈춘 듯 모교가 있는 동네를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들락거리기 시작한 것이 아마 2014년,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매혹적인 빛깔을 머금은 붓이 유년과 중년을 치열하게 오가며 한쪽으로 치웠던 미완의 캔버스에 채색을 시작한 지도 여러 해가 흘렀다.


먼 기억들이 또렷하게 살아있는 그 지점엔 잘 놀고 있던 고무줄 끊고 도망갔던 그 애와 끝까지 그 녀석을 따라가 엄지와 검지로 살가죽을 비틀어 응징을 하고 말았던 그 애,

상냥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그 애와 도도한 듯 까칠했던 그 애,

좋아한다는 말 혀 밑에 물고 답답해 하던 그 애와 도대체 저 놈이 왜 자꾸 괴롭히는지 알 수 없어 속상하기만 던 그 애,

책상 가운데 줄 그어 놓고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던 그 애와 그런 그 애가 아니꼬워서 흥!칫!뿡!쳇! 네 마디를 쏜살같이 날리던 그 애,

난로 위에 도시락 데워 먹는 재미로 학교에 온다던 그 애와 난로 밥 조개탄 당번을 묵묵히 해내던 그 애,

급식으로 받은 신짝만한 곰보빵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납작하게 만들어 먹어야 제맛이라던 그 애와 갈색 병에 든 슈퍼디(곰보빵과 함께 급식으로 나왔던 두유인지 초코우유인지 지금은 좀 헷갈리는 마실 것)를 조심스렵게 배달하던 그 애,

마룻바닥에 왁스칠하고 반질반질 윤내기 청소에 몰두하던 그 애와 선생님 몰래 도망갔다 일주일 동안 청소 벌 받았던 그 애가 십자수처럼 교차되며 앳된 모습을 드러내 웃고 있었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열세 살엔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의 이유가 속속 드러났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이유 안에 갇혀 수십 년을 살아낸 우리는 호박 속 모기(영화 '쥬라기 공원'에서는 호박 속 모기 화석에서 공룡 DNA를 추출해 복제에 성공함)가 되어버린 감성에 연둣빛 싹이 트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과 가정의 틈바구니에서 어제가 오늘이고 내일되는 오십 근처의 판에 박힌 날들, 생기 잃은 시간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십 후반의 투박한 날들, 물주기를 잊은 선인장 화분의 흙처럼 중년의 버석한 날들은 낡은 사진첩에 끼우고 대신 잠들었던 유년과 세월에 빼앗긴 청춘을 마당놀이 하듯 신명나게 불러냈다.  


운동장 위에 '오징어 게임'하려고 그어 놓은 선들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던 걸까? 우린 반별로 학교 순례를 계획했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멀고 넓었던 운동장은 조막만하게 보였고, 어딘가에 내 발자국이 남아 있진 않을까고 누빈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공기놀이나 막대자석이 진열돼 있던 학교 앞 문구점도 기웃거다. 큰 길 초입부터 교문까지 길게 늘어섰던 수십 군데 문구점은 몇 집만 남긴 채 사라진 후라 북새통이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초1때 내 번호는 82번이었고, 학년별 13~20반까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교실이 부족해 오전·오후로 나누어 두 반이 한 교실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학생이 알주머니에  들어찬 명란처럼 빽빽했으니 교실엔 여유 공간이 있을 리 없어 운동장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학교 앞을 넓게 차지했던 독가마(항아리를 구워내던 곳)도 사라지고 쫀디기도 볼 수 없었지만 침발라도 성공하기 힘들었던 뽑기의 달달한 냄새만큼은 그대로 남아 코끝이 융기하는 듯했다. 


으스스하고 흉악한 전설이 전해지던 재래식 화장실이 깔끔한 현대식으로 바뀐 게 가장 후련한 화였다. 어두컴컴한데다 깊어도 너무 깊은 변기 안에서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살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화장실 갈 때마다 머라카락이 쭈뼛 섰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


거기 그렇게 우리의 열세 살이 희미하게나마 숨쉬고 있다는 걸 함께 확인하다 보니 푸석푸석한 중년의 골짜기에 부스터 에센스를 분사한 듯 촉촉한 기운이 번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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