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고려 궁지'는 침략국 몽골에 항전하기 위해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한 후(1232) 건축한 고려 궁궐터다. 몽골과 화친을 맺고 환도(1270)하면서도 그들의 강압에 못이겨 궁궐과 성곽을 모조리 철거할 수밖에 없었던혹독한 아픔이 서린 곳. 현존했다면 역사적 가치가 높을 유적들이 일부러 지운 것처럼 흔적도없이 사라진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의 행궁(왕이 행차시 머무는 궁) 및 관청이 설립되었으나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소실되고 1977년 복원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고려 궁지'에는 고려시대에 걸맞은 궤적 대신 조선의 그림자가 소소하게 남았을뿐이다.
고려궁지 정문 승평문
궁터가 높아 궁궐의 정문 '승평문'을 통과하려면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왕의 가마가 출입하려면 가마꾼들이 땀 꽤나 흘리지 않았을까?
강화 유수부 동헌
승평문을 넘어서면 '강화 유수부 동헌(오늘날 군청)'이 나온다. 4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보호하듯 막아선 뒤로 동헌이 낮의 빛깔을 띄고 섰다. 유수(강화 행정 담당 수령)의 집무실엔 지방 관리들과 유수가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밀랍 인형으로 재현되었다. 깊이 생각한 후 바르게 판단하여 말끔한 성과를 거두라는 뜻으로 일부러 한적한 공간을 내준 것 같다. 느티나무에 초록이 짙어지면 지방 행정 관아의 위치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듯하다.
외규장각
동헌을 내려와 또 하나의 건물로 걸어간다. '외규장각(1782-정조 6)'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이다.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이 열람하는 의궤(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 정리) 및 서책이 보관되던 곳이다. 안타깝게도 병인양요(1866-고종) 때 프랑스가 의궤 및 서적을 약탈했고 나머지는 불에 타 사라졌다. 아담한 규모로 간신히 맥을 잇는 모습이 애처롭다.
2011년, 대여 형식이지만 의궤는 145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강탈해놓고 선심쓰 듯 대여하겠다는 프랑스의 태도는 제국주의적 몰지각은 아닐는지.
지금은 대여의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요청하여 환수되어야 한다. 뺏긴 거니까 돌려받는 건 당연하다. 어람용 의궤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표지 제작부터 남달랐다는데 오랜 세월 가치도 모른 채 방치한 프랑스에 권한을 줄 이유가있을까?
강화 동종
너른 궁터를 거쳐 정문 근처로 나오니 오른쪽으로 길이 있다. 몇 걸음 옮기니우람한 종각 안에 육중한범종이놓였다.
사찰도 아닌 곳에 어쩐 일로 범종이납시었나 했더니 강화 산성의 성문을 여닫을 때 사용하는 행정 목적의 '동종'이란다. 시장 근처나 성문 입구에 설치해 백성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던 소리 시계인 셈이다. '강화 동종'의 규모로 보아 멀리서도 울림이 제법 크게 들릴 듯하다.
'동종'에서 몇 계단 내려와 작은 문을 통과하니 해를 받아 훤한 ㄷ자 형태의 건축물이 번듯하다. '이방청'으로 강화 유수부의 6방(이,호,예,병,형,공방) 중 이방의 집무실이란다. 실무진들이 각각의 방을 차지하고 업무를 볼 수 있게 방이 여러 개다. 아마도 세분화된 일처리를 했던 모양이다. 수많은 민원을 신속히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건축물로 당시 공무원들의 마음 자세를 읽을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이방청 뒤뜰
나오면서 본 '이방청'은 뒤태가 서글서글하다. 일렬로 늘어선 규칙적인 기둥과 방문 아래로 긴 툇마루가너그러운 배려 같다. 민초들이 잠시 앉아 마음에 쌓인 먼지를 떨어낸 후 집을 향해 떠났을 편안한 관청 뜰이다.
약소국의 비애가 서린 고려 궁지의유적들은 침략, 약탈, 철거, 방화를 거쳐 사라지고 미흡하지만 조선의 모습으로 복원된 상태다. 고려와 조선의 숨결이 화인처럼 찍힌 가슴 아픈 현장에 덩그러니 남은 빈터가 고요하고 적막하다. 고증 자료가 있다면 고려 궁지라는 이름에 걸맞은 한 동의 궁궐이라도 복원하는 건 어떨까? 기대를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