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맛 떠올리며 빚은 만두로 전골을...
임의 순서로 진행되는 남편의 음악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족사진(김진호)'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견고한 그리움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풍성한 올림머리에 털배자(저고리 위에 입는 방한 조끼)를 입고 엷은 미소를 띤 앳된 엄마. 7대3 정도로 정갈하게 가르마를 타서 포마드 발라 빗어 넘긴 청년 같은 아버지. 사진을 찍기 위해 한껏 멋을 냈을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날로 박제된 모습. 사진 속 부모님은 언제 봐도 꽃처럼 빛나고 눈부시지만, 두 분 모두 돌아가신 지 20년도 넘었다.
들려오는 노래 사이로 입 짧은 딸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엄마의 음식도 되살아난다. 막장(허드레로 먹기 위해 간단하게 담은 된장)에 묻어둔 무를 채 썰어 참기름으로 무친 장아찌, 만두 소를 넣고 돌돌 말아 치자물 노랗게 들여 부친 밀전병, 사이다처럼 톡 쏘는 동치미 국물, 여름에 빚어 찐 호박만두가 책장처럼 촤라락 넘어간다.
강원도가 고향인 엄마는 외할머니로부터 농산물을 받곤 했다. 감자, 옥수수, 호박, 콩 등이 오면 감자 넣은 수제비, 옥수수 밥, 콩자반, 호박만두를 만들었다. 여름 호박으로 빚은 호박만두는 담백하니 별미였다. 아버지는 뜨더국(수제비)도 입안이 꽉 찰 만큼 큼직하게 뜯는 걸 좋아했듯 만두도 주먹만 하게 빚어 달라고 요청했다(오그라든 몸 펴주는 요리, 아버지는 '뜨더국'이라고 불렀다). 그래야 황해도 고향식 같다고 해서 아버지 몫은 별도로 크게 빚었던 기억이 난다. 많은 호박을 소비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음식이었던 듯한데, 호박 만두는 여름 특별식이 되었다.
만두는 보통 고기나 김치 중심의 겨울 만두를 생각하지만 냉동, 냉장 기술이 없었던 예전에는 가벼운 채소(애호박, 배추, 부추 등) 중심의 여름 만두를 빚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계절에 따라 식재료가 제한되었지만 요즘은 재배 기술과 유통 구조 발달 덕분에 사시사철 모든 채소를 구할 수 있다. 때문에 여름 만두, 겨울 만두 구분도 사라졌다. 다양하고 풍미 있는 만두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늦가을에 빚은 여름 만두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야채 가게에서 두 개 1500원에 팔던 애호박이 문득 떠올랐다. 오랜만에 '엄마가 만들어주던 호박만두나 빚어볼까' 싶어 주섬주섬 장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 '어만두'니 '편수'니 하는 고급 만두는 아니어도 비싸지 않은 애호박을 본 김에 엄마 따라 호박만두를 빚어보기로 했다.
싱싱한 애호박이 두 개 1500원 그대로다. 전날과 가격이 같아 만족스럽다. 냉장고에도 호박이 하나 더 있으니 두 개만 사도 충분하다. 숙주, 두부, 쪽파, 부추까지 사고 당근, 양파, 당면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고기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 대신 남편이 낚시 가서 잡아온 갑오징어를 활용하기로 한다. 가장 중요한 만두피가 걱정이다. 맘 같아선 직접 반죽해서 밀고 싶지만 일이 커질 듯해 시판 만두피로 방향을 잡는다.
만두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도 엄마는 기꺼이 만두피까지 밀었다. 가래떡처럼 길게 늘인 반죽을 2cm 두께로 잘라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누른 후 밀대로 밀면 주전자 뚜껑만 한 만두피가 나온다. 손이 많이 가도 정석대로 음식을 만들던 엄마의 손길을 생각하니 마음이 젖는다.
다듬고 씻고 썰고 재료 손질 시간이 제법 걸린다. 호박은 채 썰어 소금에 절인 후 수분을 제거해야 간도 배고 뻣뻣하지 않아 만두피로 감쌀 때 고분고분하다. 쪽파와 부추는 5mm 정도로 쫑쫑 썰고, 당근과 양파도 다지듯이 잘게 썰어야 만두소가 공손해 빚을 때 수월하다. 당근과 양파는 프라이팬에 살짝 볶거나 전자레인지에 2~3분 돌려 사용하는 것이 다른 채소와 익힘 정도를 맞출 수 있다.
으깬 두부와 데친 숙주는 베보자기에 싸서 물기를 제거하고 당면은 삶아 1cm 넘지 않게 잘라준다. 데친 갑오징어도 당근처럼 잘게 잘라 준비하면 재료 손질은 끝이다. 모든 재료를 한 그릇에 담아 마늘을 넣고 소금 간 한 후 들기름과 계란 한 알 깨뜨려 치대면 만두소 완성이다. 계란은 재료를 결합시키고 수분을 잡아주므로 호박만두에 적합하다.
마음 속 허기를 채운 엄마표 레시피
남편이 선택해 저장한 노래를 들으며 차분하게 만두를 빚었다. 빚은 만두는 냉동하고 몇 개만 찜기에 쪄보았다. 계획에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빚어본 만두지만 긴 시간을 할애한 만큼 담백하면서도 개운한 엄마의 호박만두 맛이 깃든 듯했다.
저녁에 냉동실에 저장해 둔 만두로 얼큰하게 만두 전골을 끓였다. 설이 지나면 엄마는 남은 나물이랑 만두를 넣어 육개장처럼 끓였는데 얼큰하고 시원했다. 만둣국을 끓일까 하다가 그 생각이 나 국물이 얼큰한 전골을 선택했다.
나물 대신 느타리버섯, 알배기, 청경채, 양파, 대파, 두부를 전골 냄비에 가지런히 담은 후 차돌박이와 만두를 얹었다. 고춧가루, 마늘, 멸치액젓, 맛술로 양념장을 만들어 재료 사이사이 떠 넣고 멸치 육수를 부어 보글보글 끓였다.
후추 톡톡 뿌리고 모자란 간은 소금으로 맞추면 얼큰한 호박만두전골이 푸짐하게 완성된다. 조금 더 칼칼한 맛이 당기면 청양고추를 추가해 준다. 남편이 후후 불며 맛있게 먹으니 만두피에 물을 발라도 잘 붙지 않아 힘이 잔뜩 들어갔던 손가락 끝의 수고가 좀 누그러졌다.
'가족사진'을 듣다가 만두전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음식이 흔한 시절이어서 만두 정도야 어디서든 먹을 수 있고 전문점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오래전 엄마 손맛을 기억하며 만든 호박만두는 어디에도 없는 음식이다. 직접 반죽하지 않은 만두피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홀로 만두 빚으며 보낸 내 하루도 엄마 손맛에 가까워지기 위해 공들인 시간이므로 스스로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사람처럼 가족을 대하라."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늘 정성으로 가족을 대하고 응원했던 엄마. 엄마가 그리워서 만들어본 호박만두로 허기진 그리움이 조금은 채워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