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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 일 중 가장 갸륵한 결심

사먹는 김치로는 다양한 요리 소화 못 해 8년 만에 한 김장

by 오순미

어릴적 엄마의 김장은 살벌한 노동이었다. 며칠씩 시간을 들여서 배추 다듬기, 절이기, 양념 준비하기, 속 넣기, 보관하기(땅에 묻는 김칫독)가 계속 이어졌다. 대가족이 모여 수백 포기씩 담그던 시절이었을 뿐만 아니라 친척·이웃이 모여 배추 다듬고 속을 넣으며 품앗이 하는 공동체 협력과 연대가 돈독했던 시기였다.



방식은 변했어도 김장은 여전히 우리의 계절 문화


김장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우리 문화지만 모습이나 방식에선 예전과 사뭇 차이를 보인다. 훨씬 작아지고 조용해졌으며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었다. 김치 종류도 다양해지고 사 먹는 소비자도 늘었다.


절임배추가 대중화 되면서 집집이 배추를 사들이는 사례도 예전에 비해 수그러들었다. 1인 또는 2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대형 김장은 점차 사그라지고 김장을 하더라도 혼자 또는 가족끼리 하는 오붓한 풍경이 대다수다. 그런 까닭에 온라인에서는 5kg이나 7kg의 '절임배추와 김칫소 세트'를 판매하기도 한다.


김장의 양상은 달라졌지만 김치가 우리 식생활의 기본이다 보니 어떤 방식으로든 겨우내 두고 먹을 저장 음식을 확보해야 월동 준비를 마친 듯 홀가분하다. 엄마가 계실 땐 일체 도움을 받았지만 돌아가신 이후 몇 년 동안은 남편과 둘이서 김장을 담갔다.


어느 해인가 김장의 힘듦을 조목조목 읊조리던 남편이 사 먹는 김치로 바꾸자고 제안한 후 10kg씩 시판 김치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편한 반면 사 먹는 김치로는 김치찜이나 시원한 김칫국, 김치찌개처럼 많은 양의 김치가 필요한 음식은 감당하기 어려워 해 먹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김치찜이 먹고 싶을 땐 묵은지를 따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힘드니까 사 먹자던 남편과 8년 만에 다시하는 김장


결국 8년 만에 남편과 둘이서 다시 김장을 하기로 결정하고 절임배추 40kg(대략 20포기)을 주문했다. 김치로 만드는 음식도 실컷 해먹고 일년 동안 김치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결정한 양이다. 오랜만에 비릿한 젓갈 냄새, 진한 육수 냄새 좀 풍겨보기로 한 것이다.

▲김칫소를 넣기 전 물기를 빼기 위해 채반에 놓은 절임배추 40kg


진정한 김장엔 북어대가리, 똥 딴 멸치, 양파, 대파, 무, 다시마를 넣고 푹 우린 육수가 들어가야 제격이므로 전날 미리 우려 놓았다. 다음날엔 일어나자마자 찹쌀풀부터 쑤었다. 찹쌀풀은 미리 우려 놓은 육수를 사용해 쑤어준 후 한김 식혀야 한다.


뜨거운 풀을 그대로 사용하면 김치맛을 좌우하는 젖산균이 파괴되어 발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므로 한김 식힌 미지근한 정도가 알맞다. 그래야 발효균도 보호하고 김치 저장성도 향상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큰 함지박에 썰어 놓은 무채, 육수, 쪽파, 대파, 홍갓, 새우젓, 멸치액젓, 배, 마늘, 생강, 고춧가루, 매실청, 찹쌀풀을 담아 슥슥 치대자 김칫소가 발갛게 버무려졌다. 찹쌀풀이 들어가 찰져 보이는 김칫소가 흰 무채와 어우러져 영롱하게 빛났다. 배춧잎을 한 장 죽 뜯어 김칫소를 감싸 우그적 씹었더니 익숙한 겨울의 맛이 감돌았다.

▲각종 재료를 한데 모아 버무린 김칫소


바닥에 주저앉으면 허리에 무리가 가는 바람에 식탁 위에 양념을 놓고 섰다 앉았다 반복하며 배추 사이 속을 넣으니 한결 수월했다. 벌겋게 양념이 밴 배추가 김치통에 차곡하게 쌓이는 모습이 덕을 품은 군자처럼 품위 있어 보였다. 시간상으론 이틀이 걸렸지만 계절과 더불어 일 년이 준비되었다는 생각에 다가올 한 해를 버틸 힘까지 충전된 기분이었다.

▲김치통에 차곡하게 쌓인 포기김치의 자태


기본 양념에 충실한 김장, 오히려 감칠맛


언제든 엄마의 손길이 옆에 있을 거라 믿어 레시피를 받아놓지 못했지만 혼자 김장했던 첫해, 엄마 김장을 떠올리며 담근 김치 맛이 예상 외로 성공적이었다. 그 후로 욕심이 생겨 이롭다는 재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연시는 천연의 단맛이라 건강에 좋다더라, 생새우는 시원한 맛을 낸다더라, 청각은 더디 시어진다더라, 함초 소금은 혈액순환을 개선한다더라 등 수많은 '~더라'에 현혹된 화려한 양념은 해마다 김치맛을 수렁에 빠뜨렸다.


그래서 올해는 딱 기본만 넣고 김칫소를 버무렸더니 각 재료의 풍미가 또렷하게 드러나서 그런가 의외로 깔끔하고 시원한 감칠맛이 돌았다. 과한 양념은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는 맛이라는 걸 깨달은 터라 올 김장은 기본 양념을 고수했다. 여름철 폭염과 길어진 가을 장마로 배추 작황이 불안정하고 고춧가루와 마늘 가격도 지역별 편차가 컸다지만 기본 재료만 사용해서 그런가 4인 가족이 일 년 동안 먹을 김장 가격치곤 혀를 내두를 만큼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담근 김장이라 돼지고기 보쌈을 생략할 수 없었다. 버무린 김칫소와 방금 삶아 따끈한 수육 한 점을 배추쌈에 얹어 입안 가득 욱여넣으니 온몸 구석구석 싱그러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은은한 젓갈 향과 배추의 고소한 여운이 코끝까지 자극했다. 재료에 스민 바람과 볕맛이 건강한 밥상을 예견하는 순간이었다.


솜씨 맛이라기보다 다듬고 씻어 간맞추려 애쓴 정성을 품은 맛이 분명했다. 생굴을 좋아하는 남편은 배추쌈에 김칫소, 굴, 수육까지 척 얹어 먹으며 힘들다, 귀찮다던 김장의 노고를 잊은 눈치였다. 김장으로 일 년 치 반찬 걱정 덜었다는 심리적 안정감이 생겨서 그런지 들인 수고와 정성이 무겁고 칙칙했던 마음을 단박에 밀어냈다.

▲8년 만에 다시 김장을 하고 만든 돼지고기 보쌈


세월이 가도 김장은 우리네 계절감을 불러오는 연례 의식으로 남을 것이다. '김장 문화'가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하다. 김장은 단순한 '저장 음식'을 넘어 한국인의 정체성과 전통적인 식생활 방식을 반영한 문화라는 점을 세계가 높이 평가하고 인정한 셈이다. 규모나 형식은 변했지만 김장은 여전히 우리의 고유한 식문화로 세대와 세대를 이어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관습이라 할 수 있다. 한 해를 무사히 보내기 바라는 마음으로 김장을 마친 건 올해 한 일중 가장 갸륵한 결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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