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오가는 길에 마주치면 눈동자나 입술의 미동으로 인사를 건넸다. 여의치 않으면 시니컬하게 지나쳤다. 퇴근 길이면지하철앞뒤 칸에나눠 타고목적지를 향해 따로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시선까지 주의하려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작전이어야 했다.
만나면서 단 한 번도 아는 이에게 들켜 당황한 적없어기세등등했다. 발각되지 않은 것에묘미를느끼며 작전 성공이라는희열에들뜨기도 했다.안효섭, 김세정('사내맞선' 주인공)인 양 모임에서도주연급 연기에몰입했다. 미안한 마음이 목구멍으로 올라왔지만 대놓고 얘기하기가 멋쩍어 꿀꺽 삼켰다. 주말이면 놀이동산도 가고 영화도 보고 거리도 쏘다니며 우리들만의 노래와 시를 모으는 채시관으로살았다.
당시엔 홍콩 누아르 영화가 대세라 '아비정전, 지존무상, 천장지구' 등이 상영되었고 유덕화, 장국영, 주윤발이 맹활약하였다. '사랑과 영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귀여운 여인'이라는 로맨스물 영화도 긍정적 평가를 받으며 고공행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극장, 피카디리, 단성사에 바친 문화 비용은 녹록지 않았지만 포인트처럼 쌓여가는 우리의신뢰는꼬박꼬박적립할 수 있었다.
톡쏘던 비밀 연애의 순도 높은탄산이 슬금슬금빠져나가 밍밍하게 되어갈 무렵얼토당토않은 데서 꼬리를 잡혔다.
달빛을 품은 바람이 따라오라는 대로 집까지 함께 걸어간 날이다.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며 걷는데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 내 눈을 파고들었다.이내 의심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며갸웃거리는 실루엣이 곁눈질에도 정확히 맺혔다. 굶주린육식동물이 사냥감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기며 끝까지 추적하겠다는 의지가 뒤통수에도 꽂혔다.
맞지?신협 직원. 봤어?
글쎄 어두워서 잘.
보던 얼굴인 것도 같고.
확실해. 신협직원이었어. 들통났네.
들킬 일 없다고 확신하는순간빼죽이 열린 방심의 틈새로 사내 신협 직원의 화살이 10점 만점에 10점으로명중하고말았다.
'설마 발설하진 않겠지.'
간절한 바람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다음 날 오전 기구팀 과장이 간이 의자 하나 들고 내옆자리로 오더니 능청스럽게물었다.
'쪼가리(당시 그의 별명)랑 사귄다며?'
아뿔싸,
이 분이 알면 다 안다고 봐야 한다.
순간 벌건심장이 사무실 바닥으로 뚝 떨어져 두세 번 펄떡이더니 이내 하얗게 빛을 잃었다.
품기 힘든 존재가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인지상정이라는 게 있으니 상대의 사정을 한번쯤 헤아려본다면 묻어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두운 데서 본 상황을 어찌 확신하고곧바로 소문을 퍼뜨릴 수 있단 말인까?
신협 직원의 가벼운 행동에 복두장(幞頭匠 : 왕이나 벼슬아치가 머리에 쓰던 복두를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하던 사람)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새삼 위대하게 다가왔다. 끝내 지키지 못해 세상에 알려지긴 했으나 지키려고 애쓴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가?
축하하는 사람, 놀라는 사람,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고 서운해 하는 사람, 말없이 빙긋이 웃어주는 사람 등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그의 독일출장이 연장되자 후발로 출발하는 부서장은편지를 써오라고 했다.일은 안 하고 연애질이나 한다며 웃음기를 담았던 부서장의핀잔이 서운하지 않았던 건 눈에 서린 응원 핏을 보았기 때문이다.
젊고 자유롭던 시절의 사내 연애는 우려했던 대로 부서를 떠들썩하게 흔들었다. 간혹 장난 섞인 놀림이 불거졌지만 마음 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낭만이나 감성은 안티에이징을 하지 않아도 노화의 정도가 더디다고나 할까?
아날로그 감성에 젖었던 그때 그 시절이 스트라이킹 팝핑 캔디처럼 톡톡 튈 때면 완벽한 비밀이라고 착각했던 교만한 달콤까지 덩달아 뛰어올라 마음이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