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모르는 가족을 향해 레드 카드를 날렸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화내는 내 모습이 모노드라마 같았지만 매서운 눈초리로 라디오를 쏘아보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 가족의 밉상을 그렇게라도 나무라고 싶었다.
갱년기 앓이 중인 주부가 저녁 밥상이 격렬하게 차리기 싫어 3분 카레를 사왔단다. 그래도 양심에 찔려 양파 좀 더 썰어 넣고 끓여냈더니 단박에 알아채고 핀잔을 주더라는 사연이 라디오를 타고 흘러 나왔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미로에서 데리고 나오지는 못할망정 핀잔이라니 듣는 순간 비위가 거슬렸다.
갱년기 탓에 겨울인지 여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안쓰러운 그녀를 위해 시인의 의자로 가만히 이끌어쉼을 나누고 싶었다.
와서 앉으렴,
내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김명인의 시 ㅣ<의자> 중에서-
3분 카레그녀 덕에 그날 저녁 나도 카레를 준비했다. 저녁 메뉴 선정에 고민을 더하지 않아도 됐지만 차려낸 카레에선 웬일인지 갱년기 맛이 났다.
만만다행으로 식구들은 차려주는 밥에 군소리없는데도
'웬만하면 챙겨야 할 끼니와는이별하고 싶다.'
소리가 입안 곳곳 허옇게 구내염으로 패인 건 말해 뭐해.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지만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그녀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같은 시절을 겪고 같은 상황을 버티는 데서 오는 동질감이었을 것이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타박하는 입만 동동 떠다니는 식탁 위엔저녁 밥이 3분 카레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듣고자 하는 귀는 어디에도 없었다. 듣는 일에 인색한 시대에살고 있다지만가장 가까운가족의 마음조차 들으려하지 않다니 섭섭하고 언짢아 그녀 대신 눈에 힘이들어가고 말았다.
왜소한마음을 들어주는 이 없는 시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진실을 왜곡하는 사회, 자세히 듣지도 않고 함부로 판단하는 경우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란 걸 잊어간다.
"걔 미친 거 아니니? 무시해 그냥."
"그 쉬키돌+I네. 받아버리지 그냥 뒀어?"
이런 말 들을 때면 그렇게 하지 못한 감정 때문에 모자람이 확대되어 더 초라한느낌이 든다.
"니 생각이 좀 짧았네. 지는 게 이기는 거란 말도 있잖니. 좀 참지 그랬어."
이런 말도 딱히 마음을 차지하진 못한다. 맞는 말일지라도 이미 행한 일을 전 상태로 무를 수 없으니 마음만 더 복잡하게 꼬인다. 그저 아무말없이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데도 상대는 자기 방식대로 빼고 더하여 말하기 바쁘다. 잘잘못을 파헤치고 처단한 후 일찌감치 상황을종료하려 든다. 그럴 땐 괜히 말했구나 싶어 벌린 입을 후회하며 빗장을 채운다.
정말로 절박할 땐혼자 견디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어차피 상대의 방식대로 해결할수도 없을 테니까. 극복할 사람도 나고, 감당할 사람도 나니까 내 감정 소모에 귀기울이고 충실한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아니면 3분 카레 그녀처럼 생면부지 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격하게 공감하며 들어주는 이 하나쯤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마음을 때리는조언은 늘어놓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