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이 달라지자, 우리도 달라졌다.
어릴 때부터 1호는 내게 호소하곤 했다.
“어린이집 가기 싫어.”
“유치원 가기 싫어.”
“학교 가기 싫어!!!”
그러나 선생님들께 물어보면 늘 똑같은 피드백을 받았다.
“아이가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힘들어한다는 걸 나는 알았다. 1호는 나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나마 나에게라도 이야기하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는 그것을 감당할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나 스스로도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신랑에게 자주 이야기했다. 1호의 환경을 바꿔주고 싶다고. 힘들어하는 1호를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너무 힘들다고.
그러던 어느 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호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다. 등교 준비로 분주한 아침, 1호는 여전히 채비를 하지 않고 꾸물대고 있었다. “얼른 가야지?” 하고 내가 재촉하자, 아이는 학교 가기 싫다며 자기 팔을 연필로 긁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죽고 싶다”는 말을...
그어진 연필 자국선이 팔뚝 위에 선명히 남아, 그 자리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 청천벽력 같은 말을 처음 들은 순간, 내 억장이 무너졌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1호의 어깨를 잡고 밀치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왜 죽고 싶어? 왜? 왜? 왜!!!”
그 순간, 아이를 안아주고 차분히 마음을 읽어주고 마음속 얘기를 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 당황했고, 그 말이 튀어나온 짧은 시간에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잘못을 저지른 뒤 옷을 홀딱 벗긴 채로 마당으로 쫓겨난 적이 있다. 그게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나에게 남아있다, 홀로 마당에 남겨진 칠흑 같은 밤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돌멩이로 손목을 긁은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이 스쳐 지나오자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푸시하지 않고 공감하며 키우고 있는데도 왜?’ 하는 억울함과 ‘왜 이 아이는 죽고 싶을까?’ 하는 혼란이 동시에 밀려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결국 그날 아침 나는 선생님께 전화를 했고, 1호는 학교를 안 갔다.
상담 치료를 불신하던 신랑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두 시간에 걸친 검사 끝에 “우울증 기질이 저변에 깔려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혹시 임신과 양육하는 동안 내가 우울해서 아들에게 영향을 준 건 아닐까?’ 자책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이제부터라도 긍정의 마음으로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몸을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이와 함께 그림 상담과 놀이치료를 병행하던 무렵, 신랑에게 미국 주재원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남편에게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던 시기였으니, 갑자기 근무지를 바꾸는 것이 그에게는 손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와 1호를 위해 그 자리를 내려놓았다.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당시 그는 꿈꿔왔던 높은 자리를 내려놓았다고 했다. 모든 결정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평온했다. 맑은 하늘, 탁 트인 초록 들판. 그 자연이 나를 치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이들을 태우고 시골길을 달리던 중 창문을 내리자 따뜻한 바람과 햇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아,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자연이 주는 선물 같은 순간이었다.
달라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에서의 학교 생활을 하며 1호는 점점 평온을 찾아갔다. 훨씬 잘 웃고 밝아졌고, 괴로움을 호소하던 일이 믿기지 않게 사라졌다.
궁금하고 호기심이 많던 1호는 자신이 궁금했던 질문을 제한받지 않고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점점 재미를 찾아갔다. 자연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환경에서 더 평온해졌다. 잘한 일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어두웠던 마음이 서서히 치유되는 듯했다. 학교 가기 싫다던 아이였는데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이제는 학교 생활을 재미있어했다.
아이와 엄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 아이가 평온해지자 내 마음에도 따뜻한 빛이 들어왔다. 아이가 안정되자 나 역시 나를 돌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아이를 단단하게 키우기 위해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생겼다.
미국에 오기 전 2년 동안 K-pop 댄스로 두통이 줄어든 경험이 있었기에, 여기서도 운동을 이어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을 안다. 혼자서는 절대 꾸준히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YMCA 프로그램을 찾아 등록했다. 줌바댄스와 필라테스, 일부러 원어민 강사 수업을 골라 들었다. 운동과 영어,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다.
운동을 하면서 매일 소소한 성취감이 쌓였다. 몸에 집중하자 긴장도가 조금씩 풀리고, 컨디션이 좋아지니 기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몸과 마음은 연결돼 있었다. 몸을 움직여야 마음도 회복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 시골길의 따뜻한 햇살과 바람처럼, 내 마음에도, 1호의 마음에도 다시 온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최근 1호가 이번 방학에 갑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학교 가기 싫다고 했던 아침에, 난 엄마가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어.”
헉.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때때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1호를 밀쳤던 죄책감은 내가 지우고 싶어 했던 과거였다. 1호가 기억하지 못하길 바라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숨을 가다듬고 겨우 참으며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그때 엄마는 어른으로서 성숙하지 못했어. 네가 속마음을 꺼내는 것을 듣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널 밀치고 소리친 거야. 정말 미안해. 엄마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너를 사랑해, 아들.”
아들은 “괜찮아”라고 말했고, 나는 1호를 꽉 끌어안았다. 화해의 순간이었다.
너무나 미안했다. 아이는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인 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엄마의 반응에 상처를 받고 묻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린 시절 아빠에게 받았던 상처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듯, 1호의 기억도 깊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빠와 화해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적어도 아들과는 그런 앙금을 풀 수 있어 다행이다. 설령 다 풀리지 않았더라도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