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과 우울을 반죽으로 이겨낸 시간
2020년 3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멈췄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삶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의 틈을 잠식했다.
하나둘 문을 닫는 시설들, 학교와 상점들.
타지에서 느끼는 막막함은 두려움과 공포로 자라났다.
미국에서 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원 사정은 열악했고, 코로나 확진자가 되면 입원할 병원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설령 병원이 있다고 해도 1인실에 혼자 갇혀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만으로도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 땅에서..
매일 뉴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사망자 수가 카운트되듯 올라가는 것을 보며, 언젠가 그 숫자에 내가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때의 공포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외출이 금지된 날들이 길어지자, 내 안의 고질병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기력증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 와서 일부러 몸을 움직이겠다고 다짐하며 한국 드라마를 끊고 멀리했었는데, 집 안에 갇히자 금세 예전의 나쁜 습관들이 되살아났다.
즉각적인 도파민에 기대어 드라마에 빠져들수록 나는 점점 더 피폐해졌다. 알면서도 방치했다.
현빈이 나오는 드라마와 영화를 모조리 정주행 했다. 거의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심보였을까.
16부작을 새벽까지 연달아 보느라 머리가 아팠고, 에드빌까지 먹어가며 끝까지 시청했다.
『사랑의 불시착』을 시작으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협상』, 『공조』, 『꾼』, 『만추』, 『역린』, 『창궐』까지. 그다음은 BTS였다. 끝도 없는 유튜브와의 동행이었다.
아이들이 부를 때면 짜증이 치밀었고, 겨우 끼니만 챙겨줬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것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난...
그렇게 나는 드라마와 유튜브에 몸을 맡긴 채 침대와 한 몸이 되어갔다. 마치 시체놀이를 하듯.
수많은 드라마와 유튜브 시청이 남긴 건 오직 공허함뿐이었다.
나란 사람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자기 효용감은 바닥을 뚫고 내려갔고, 자존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생산적인 일을 주체적으로 할 때 비로소 쓸모를 느낀다. 그것이 결국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숨만 쉬며 하루하루 버티는 삶으로 돌아갔다.
운동으로 쌓아온 루틴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무기력은 심해졌고, 이어서 우울이 찾아왔다.
아무 의욕도 없는 나 자신이 싫어졌다.
나는 다시 의미 없는 질문을 반복했다.
“왜 살아야 할까.”
“굳이 살아야 하나.”
죽지 못해 사는 기분이었다.
그때 그냥 운동화를 신고 동네라도 뛰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빠가 늘 말씀하셨다.
“힘없다고 집에만 누워 있지 말고 나가서 걷기라도 해라. 누워 있으면 있던 근육도 다 빠진다. 병원에 걸어 들어가도 계속 누워 있으면 퇴원할 땐 휠체어 타고 나와. 너 지금 나이는 30대라도 몸은 70대보다 더한 상태일 거다. 움직여야 살아.”
내가 존경하는 정희원 교수님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귓등으로 흘려들었을 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몰랐다.
정주행으로 무너진 수면 패턴은 몸과 마음을 함께 무너뜨렸다.
잠, 운동, 식사, 마음 챙김.
모든 건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도 함께 무너진다.
새벽까지 드라마에 빠져 폐인처럼 지낸 몇 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기력과 우울에 쉽게 잠식된다는 걸. 정신을 차려야 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우울의 늪에 더 깊게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내가 붙잡은 방법은 ‘베이킹’이었다.
하루에 두세 가지 빵을 구웠다. 빵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 만들 빵을 검색하고 바로 반죽했다.
빵을 만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나에겐 유튜브 선생님이 있었으니까 (웃음)
아침에 만들 빵을 정하고 반죽하고 발효시키고, 오븐에 넣고, 완성되면 포장했다.
신랑과 아이들에게 줄 빵을 남기고, 차를 몰아 친구 집 문고리에 걸어두고 돌아왔다. 코로나 공포가 극심하던 때라 얼굴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길엔 드라이브 스루로 스타벅스에 들러
달달한 커피를 사 마시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집에 와서는 또 빵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붙잡았다. 침대에 누워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것보다 훨씬 덜 피폐했다.
오븐에서 나온 빵을 볼 때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런 걸 만들 수 있구나.”
그 뿌듯함이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물론 일장일단은 있었다.
신랑이 살이 쪘다. (웃음)
미국에서 신랑이 살찐 건, 다 내가 만든 빵 때문이었을 듯.. 웃픈 현실이었다.
이번엔 베이킹이 나를 살렸다.
시련이 올 때마다 감사하게도 나를 일으켜 세워준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버텨낸 길고 어두운 시간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 미국의 코로나 락다운은 불안과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걱정을 사서 하는 나에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