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사이 May 16. 2016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시리고 푸른 청춘의 조각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이런 '류'의 소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다.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처럼 초점없이 흩어져 있는 문장들.


상실감과 허무감은 비단 한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청춘이어서만 겪는 게 아니기에..


나도 함께 흔들린다.

취한다.

혼란을 거듭한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숨을 쉴 때마다 나를 잊어간다. 몸에서 온갖 것들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내가 인형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방은 달콤한 공기로 가득 차고 연기가 폐를 마구 긁는다.
내가 인형이라는 감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놈들 생각대로 움직이면 된다, 나는 최고로 행복한 노예다.

어이, 류 너, 완전히 인형이야, 우리의 노란 인형, 나사를 멈춰 죽여버릴 수도 있어.


돌아갈 곳이 있을까.


포플러 줄기에 가만히 움츠린 껍질 딱딱한 곤충이 세찬 바람에 날리는 비를 맞고 튕겨 나가더니 물을 거슬러 나아가려 한다. 저런 곤충에게 돌아갈 둥지가 있을까.


그럼에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감각들.


비는 온갖 장소에서 튀어올라 온갖 소리를 낸다. 풀과 작은 돌과 흙 위에 빨려들 듯 떨어지며 비는 작은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소리를 낸다. 손바닥 만한 장난감 피아노에서 나는 것 같은 그 소리가 헤로인의 여운이 만들어내는 귀울림과 겹친다.

젖은 장소는 상냥하다. 풍경의 윤곽이 빗방울을 머금어 뿌옇고, 사람 목소리와 차 소리는 끝도 없이 떨어지는 은 바늘에 부딪쳐 부드러워진다. 바깥은 나를 빨아들일 듯 어둡다. 마치 몸에서 힘을 빼고 누운 여자처럼 눅눅하고 어둡다.


두려워할 거 없어.


정신 차리고 잘 봐, 아직 세계는 내 아래 있지 않은가. 이 땅바닥 위에 내가 있고, 땅바닥 위에는 나무와 풀과 꿀을 집으로 나르는 벌과 굴러가는 공을 따라가는 여자애와 달려가는 강아지가 있다.
이 땅바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과 강과 바다를 거쳐 모든 장소로 통한다. 그 위에 내가 있다.
두려워하지 마, 세계는 아직 내 아래 있잖아.


이 통증도 곧 그칠 테니까.


어릴 적 달리다가 넘어져 까진 무르팍이 시리고 아픈데 거기에 냄새 지독한 약을 바르는 것이 좋았다. 쓸려서 피가 밴 상처에는 반드시 흙이나 진흙 아니면 풀물이나 찌부러진 벌레 같은 것이 달라붙었는데 거품을 내며 스며드는 그 소독약의 아릿한 통증이 좋았다. 놀이가 끝나고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상처를 후ㅡ후ㅡ부노라면 저녁 나절의 회색 풍경과 내가 서로 녹아드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헤로인과 점액으로 여자와 하나로 녹아버리는 것하고는 정반대로 통증을 통해 주위 세계와 또렷한 선을 긋고 통증을 통해 내가 빛나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빛나는 나이기에 저물어가는 아름다운 오렌지색 빛과 함께 화해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처절하리만치 시리고 푸른 청춘의 조각.


다시 일어서고 싶다.


가장자리에 피가 묻은 유리 파편은 새벽 공기에 닿아 투명에 가깝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나는 일어서서 내 방으로 걸어가며 이 유리처럼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이 하얀 기복을 비쳐내고 싶었다. 나에게 비친 하얀 기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시 아보자.


나는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새를 기다렸다.
새가 날아 내리고 따스한 햇살이 여기까지 비치면 길게 뻗은 내 그림자가 회색 새와 파인애플을 감쌀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이책 읽기를 권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