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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사이 Jun 12. 2016

소설 《핑거스미스》와 영화 <아가씨>

원작과 각색의 묘미

영화 <아가씨>를 보고 왔다. 그것도 엄마랑..

오래 전에 소설 《핑거스미스》를 박찬욱 감독님이 영화로 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화를 보려고 마음은 먹었으나 엄마랑 볼 계획은 없었는데..

옆에 앉았던 여자분처럼 혼자 볼 것을. 엄마랑 나란히 앉아서 보기엔 다소 민망한 장면들이 확실히 있다.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난  《핑거스미스》도 읽었고 궁금했던 영화도 보고 나서 속은 후련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는 영국 작가 사라 워터스의 장편소설로 2005년에 이미 영국드라마로 각색된 이력이 있다.

내가 읽은 당시의 책표지. 지금은 절판되어 새로운 표지로 개정판이 나왔다. 난 이 느낌이 더 좋은데..

엄청난 두께와 빽빽한 글씨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집중해서 읽다보면 긴밀하게 짜여진 플롯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진진한 내용에 어느새 한 권을 다 읽게 된다.


책소개를 보면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를 표방하지만(사라 워터스는 실제 레즈비언과 게이 소설로 학위를 받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호칭만으로는 부적절함을 느낀다.

거대한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서로 속고 속이고 사랑하고 배신하고 음모와 비밀이 가득한 인물들의 이야기 가 긴밀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요인물


소매치기들의 품에서 자라난 여자 '수전 트린더',

그녀를 딸처럼 아끼지만 의외의 비밀을 갖고 있던 '석스비 부인',

뒤통수 제대로 때려주는 부유한 상속녀인 '모드',

그녀를 자신의 탐욕 충족의 도구로 여기는 삼촌 '릴리',


세상은 그걸 쾌락이라 부른다. 삼촌은 그걸 수집한다. 철저히 보호되는 서가에 깨끗이 보관하고, 순서대로 정리한다. 그러나 그 보관이란 것이 매우 묘하다. 책을 위해 책을 갖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기묘한 탐욕의 충족을 위한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보관한다.


그리고 '모드'와 결혼하여 그녀의 재산을 가로챌 속셈을 꾸미는 가련한 사기꾼 '젠틀먼' 이다.


소설 속 사건의 발단

사건의 발단은 '수'가 '모드'의 하녀로 들어가 '젠틀먼'이 '모드'와 결혼하는 일을 돕게 되면서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우리는 비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비밀이었고 비열한 비밀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밀이었다. 지금에 와서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은 누구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사기꾼은 누구인지 정리해 보려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1부는 수의 시점, 2부는 모드의 시점 , 3부는 두 소녀도 모르고 있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


그리고 영화 <아가씨>

영화에서도 구성은 3부로 나뉜다.

1부 숙희 시점, 2부 아가씨 시점, 3부 이후의 뒷이야기.

그러나 마지막 3부에서 소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 박찬욱 감독님이 의도한 결말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봐서 반전의 재미는 제대로 못느꼈지만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섬세한 영상미는 여운이 많이 남는다.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주는 대규모 저택과 정원, 커다란 벚꽃나무, 음란 서적의 낭독이 자행되는 지하 서재 장면 등.

영화에서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서재지만 음란한 행위가 언어로 자행되는 불질러버리고 싶은 공간이다.


백작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의 깨알같은 유머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특히 그의 마지막 대사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모부 코우즈키의 가학 행위와 백작의 최후 과정도 영화에서는 훨씬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남성들.

히데코를 위한 숙희의 적극적 행동.


소설에서는 훨씬 은밀하게 묘사되는 부분들이

영화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남성과 하는 행위와 달리 격렬함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그게 단지 여자일 뿐 이라는 생각도 든다.


  ... 우린 단지 이런 고립된 장소에 너무나 오랫동안 같이 있던 것뿐이다.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는 너무나 솔직하고, 너무나 풀어져 있고, 너무나 자유롭다. 수는 하품하고, 기댄다. 여기저기에 스치고, 까인다...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어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없이 생활해 온 그녀에게 수(영화에서는 '숙희')는 그런 존재다.

'나를 망치러 온 구원자, 나의 동무 숙희'

남성중심의 시대에서 남성을 배재하고 결말에서는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하는..두 여성.


두 작품을 비교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원작 소설을 바탕에 두었다기보다는 원작에서 영감을 얻어 모티브를 차용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본 소설과 영화의 주요한 차이점


첫째, 시대적 배경


소매치기, 도둑을 뜻하는 《핑거스미스》 소설의 배경은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상케하는 1860년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 뒷골목이다.음습한 런던의 빈민가 뒷골목과 부유한 상류층의 대비가

화 <아가씨>에서는 1930년 일제강점기 로 옮겨오면서 일본어, 기모노 복장과 헤어,

음란한 낭독회의 희생양 히데코 역의 김민희

'주온'을 연상시키는 벽장, 일본 다다미방, 일본어로 낭독되는 음란서적  등..전반적으로 일본 냄새가 짙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지배계층의 변태성향과 추잡함을 드러내기 위함일까.



둘째, 인물의 변화


소설의 두 여자 주인공

수 트린더는 숙희( 김태리) ,

모드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 (김민희).

그리고 젠틀먼은 사기꾼 백작 (하정우),

삼촌 릴리 씨는 코우즈키 이모부 (조진웅),

석스비 부인은 복순이모(이용녀 )로.


특히 소설에서는 '석스비 부인'이 두 소녀의 운명과 반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영화에서는 많은 부분 생략되고 비중이 거의 없다.

대신 영화에서는 짧고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 히데코 이모 (문소리)가 등장한다.



셋째, 소재의 상징성


'장갑'

소설에서 모드(영화에서는 히데코)는 시종일관 장갑을 끼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장갑을 갈아낀다. 영화에서도 이런 모습이 비춰지긴 한다. 각기다른 장갑이 빼곡한 서랍장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소설에서는 삼촌의 지시와도 관련이 있지만 책표지에도 그려진 장갑은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어 비중있게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히데코가 손을 장갑으로 감추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나오고 너무 쉽게 벗어버린다.


'방울'

영화에서는 장갑 대신 소설에 없는 새로운 소재 '방울' 이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폭력의 도구이자 해방의 도구라고 해야 하나.

영화를 직접 보고 판단해야 될 부분이라 자세한 언급은 안하고 싶다.



넷째, 결말 처리 방식


반전과도 관련있는 결말 처리 방식이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다.


소설과 영화 모두 동일하게 3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영화 <아가씨>의 3부에는 소설 《핑거스미스》 나오는 두 여자 주인공에 얽힌 비밀이 담긴 또하나의 반전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내용에 이미 너덜너덜해져서인지 영화 2부에 밝혀지는 내용도 밋밋했다.

(오히려 처절하게 응징하는 3부의 잔인한 장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영화를 보고 책을 봐도 좋을 듯 싶다.

책 속엔 또 하나의 기막힌 반전이 숨어있으니.

(통속적이다 라는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을 읽는 재미마저 떨어뜨릴 수 있으니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겠다.


소설은 소설대로 더 은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영화는 영화대로 빼어난 영상미와 극대화된  장면들이 각각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 《핑거스미스》와 <아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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