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인간은 어디에 있었는가'
《소피의 선택》 월리엄 스타이런 지음ᆞ한정아 옮김
총 두 권의 적지 않은 분량의 책임에도 조금의 지루함도 느낄 수 없는 책이다.
중간중간 쉬었다 읽어도 다시 몰입하게 되는
흔치 않은 소설 중 하나라고 감히 장담한다.
소설의 시작은 서술자(스팅고)가 젊은 소설가 지망생으로 매우 흥미롭게 전개되나
스팅고가 두 인물(소피와 네이선)을 만나면서 점차 시대사회적 이야기가 깊어진다.
소설이지만 허구가 아닌 실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는 수작秀作 《소피의 선택》은
인류의 악으로 평가받는 나치의 인종 대학살, 미국 남부의 노예 제도, 인종 차별주의 등의 끔찍한 비극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무지하고 무심해도 좋다. 저자의 필력과 방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고통스럽지만 생생하고 상세하게 그 시대를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무지와 무감각이라는 말은 다시 꺼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주요 역사적 배경이 되는 1940년대 제2차세계대전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다룬 작품들 <쉰들러 리스트>, <죽음의 수용소에서>, <피아니스트>, <안네의 일기>, <인생은 아름다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사라의 열쇠>, 그리고 최근에 읽은 <책도둑>까지. .
고통스럽지만 알아야 하기에,
남의 역사가 아닌,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자행된, 치욕스런 우리의 역사적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읽어내려 갔다.
<책도둑> 은 비극적 시대 속에서도 책을 통해, 그리고 사람을 통해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들의 가슴 뭉클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면, 《소피의 선택》 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폴란드 여인 소피를 통해 살아남은 자의 처절한 생과 고통스러운 기억을 한 몸이 되어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누군가를 작별 인사 없이, 위로나 이해의 말 한 마디 없이 죽게 한다는 것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에요.
주요 줄거리
1950년대 뉴욕, 작가 지망생 스팅고는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소피와 그녀의 연인 네이선을 만난다.
소피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고국 폴란드에서 나치에게 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잔혹한 학살을 목격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건너온다.
우연히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유대인 네이선과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둘의 사랑은 격정적으로 커져 가지만,
전쟁과 학살 그리고 두 아이를 두고 끔찍한 선택을 강요당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니고 있는 소피는 유대인이라는 굴레 속에서 종종 극심한 발작을 일으키는 네이선의 광기로 인해 둘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되는데..
(소피가 스팅고에게 동반자살 소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네이선이 마약을 하고 있다는 말에서 이들의 결말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혼란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음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네이선의 내면에 숨어있는 어둡고 상처받은 영혼이 그 하나라면, 소피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통과 혼란과 자기기만과 무엇보다도 죄책감으로 점철된 과거의 기억이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끔찍한 연기처럼 여전히 소피의 현재를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하나였다.
네이선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소설은 <마담 보바리>인데, 형식적인 완성도 때문만이 아니라 자살이라는 해답이 가진 설득력 때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엠마의 음독자살은 너무도 아름답고 불가피해 보여서 서양 문학에 드러난 인간 상황의 훌륭한 상징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 소피에게 '미친 선택'을 강요한 군의관의 끔찍한 죄악이 드러난다.
극악무도한 죄악.
교묘하게 관용을 베푼다는 점에서 가장 빛나는 죄악, 바로 선택..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거지?
그분은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지, 아마?"
소피는 두려움에 목이 콱 막힌 것 같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나만 데리고 있어."
"뭐라고요?"소피가 말했다.
"네 아이들 중에 하나만 살려 줄 수 있다고.
누구를 데리고 있겠나?"
"제가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럴 수는 없어요! 선택할 수 없어요!"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지른 비명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천사들도 이렇게 큰 소리로 절규하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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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 아우슈비츠로, 그리고 브루클린 거리로 악마처럼 잔인하게 그녀를 쫓아다닌
'악(惡)'
그녀의 입장이 되어 끔찍하고 극단적인 상황들에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지 수많은 질문들을 던져보게 된다.
한쪽에서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이 일어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극악무도한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고 나역시도 때로는 나약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다.
희망을 찾아도 되는 걸까?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걸 보여주는 이들이 곁에 있고, 삶을 지속시켜 주는 책이 나와 함께 해주기에 살아 있는 한은..
책 속 메모
도시건 농촌이건 이 근처 어디서나 보게 되는비참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그 피부색이 어떤 색이건 간에, 계속 억압할 수 있는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단다. 흑인들이 버스 뒷자리가 아니라 어디에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앉아서 버지니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런 날을 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것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경멸감, 타인과 심지어 자기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죄책감을 인간의 영혼에 깊숙이 각인시킨다. 논리적으로 볼 때는 범죄가 그러해야겠지만 실제로는 고통이 그러하다.
나는 모든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를 뽑고 머리카락을 자른 후 사체를 불태우고 묻어 버리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 끔찍한 일들을 밤이고 낮이고 지켜봐야 했다. 끔찍한 악취가 진동하는 가운데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끌고 나와 불태우고 묻는 일을 몇 시간이고 서서 지켜봐야 했다.
악명 높은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선동가인 빌보.
그 폭군이 암에 걸려서 그 거친 주둥이와 사악한 혀가 곧 조용히 쉬게 될거라니, 참 놀랍고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곧 사라진다니 잘 됐어, 이 사악한 범죄자.'
나는 다시 혼잣말을 했다.
소피 그녀의 몸에, 특히 상반신에 남의 눈이 머물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옷을 입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여성다움이 경시되다 못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은 시대의 기준에 보더라도 지나치게 점잖은 옷만 입었다.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던 과거가 자신의 몸에 끼친 영향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니가 헐거워져 빠질 때가 가끔씩 있었고, 목에는 보기 흉한 작은 주름들이 있었으며, 팔뚝 살은 축 늘어져 있었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보편적인 인간 가치에 비추어 보더라도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달라서, 그리고 그런 판이한 성격의 일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이 너무도 끔찍한 모순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에는 다른 두 종류의 시간이, 선한 시간과 인간을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비인간적인 시간'이 존재한단 말인가?
소피가 아우슈비츠라는 생지옥의 손아귀로 들어가던 1943년 4월의 첫날 나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곳에 있지 않았던, 그리고 마치 다른 행성에 살았던 것 같은 우리에게는 동시적이기는 하나 효과적으로 비교하거나 의사소통할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다른 종류의 시간과 이어주는 연결 고리.
내게 그 사람은 소피였다.
그녀가 아우슈비치에서 지낸 이십 개월.
그 일을 온몸으로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그녀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같은 정도의 고통을 겪고 살아남은 어느 유대인 못지않게 고통을 겪었으며, 또 서서히 밝혀지겠지만 어떤 면으로는 대부분의 생존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자신이 천인공노할 범죄의 공범자 역할을 했다는 그 끔찍한 사실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광적이고 탐욕스럽고 집착이 강한 반유대주의자, 유대인 혐오자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나치는 숙련된 기술로 죽음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잔인한, 삶 속의 죽음을 만들어냈다. 도착 초반에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앞으로 자신들이 고문과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삶을 살다가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역경은 이해와 동정이 아니라 잔인함을 낳는다.
음악은 나한텐 피 같은 걸요.
삶을 유지시켜 주는 피 말이에요.
이제까지 아우슈비츠에 대해 나온 설명 중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은 단정 짓는 문장이 아니라 되물음이었다.
질문 :
아우슈비츠에서, 신은 어디 있었는가?
대답 :
인간은 어디 있었는가?
'나'에서 '우리'로 이어지는 책읽기를 실천할 수 있도록 좋은 책을 소개해 주신 불이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서를 읽고 직접 번역도 하시는 불이 작가님의 의미있는 리뷰도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