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름을 불러주는 감동의 순간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간 수많은 이름들

by 마음이 동하다

태아나면서 내가 받아 든 숫자는 0505다. 대학 시절엔 051, 군 복무 중에는 5640이었다. 첫 직장에서는 '김쌤'으로 불렸고, 두 번째 직장에선 '김대리'에서 '김과장'으로, 현재는 '실장'에서 '과장', 그리고 '팀장'으로 불리고 있다. 앞에 '홍보팀장'이라는 단어가 붙기도 한다. 이렇게 숫자와 직책만이 존재할 뿐,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간 수많은 이름들
너무나 사소해서 무심결에 지나치는 것들이
때로는 가장 의미 있는 건지도 모른다.
_김이율《익숙해지지 마라. 행복이 멀어진다》(지식너머)


3월 둘째 주 출근하니, 책상 위에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동하팀장님, 카메라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HR팀의 박○○ 선생님이 남긴 메모였다. 아마 지난 토요일 신규 직원 교육에서 사용한 카메라를 반납하면서 쓴 것 같았다. ○○쌤은 HR팀에 들어온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새내기 직원으로, 이곳이 첫 직장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내 나이보다 두 배 이상 차이가 날 것 같다. 사실 그녀의 나이를 모르는 나는 어림짐작할 뿐이다.



이름 (1).jpg


그런데 메모에서 그녀는 '동하팀장님'이라고 내 이름을 적어놓았다. 보통 다른 부서의 직책자나 나이 차이가 나는 직원에게는 부서와 직책을 쓰는 법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가끔 동갑내기 ○○실장이 내 이름을 '동하팀장'이라고 부른 기억이 있지만,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쌤에게 직접적으로 불려본 건 신기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고,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며칠 후,


간호팀의 부팀장님과 업무 관련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주로 안내문이나 출력물에 대한 부탁이었고, 내 업무 중 하나는 이를 깔끔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나이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고, 50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나와 이미 50이 된 그녀의 어설프고 유치한 대화가 흘렀다. 대화 말미에 즐거운 저녁을 보내시라는 인사를 하며 이름을 불러드렸다. 며칠 전의 에피소드와 함께 일부러 의도된 연출이었다. 부팀장님은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며 낯설고 익숙하지 않다고 웃었다. 나는 그 멋진 이름으로 라임을 만들어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


네이버 국어사전을 검색해 '○'으로 시작하고 '정'으로 끝나는 단어들을 수집했다. 그 중 의미가 좋은 '정'으로 끝나는 단어들을 선택했다. 주로 8행시로 시를 짓는데, 단어는 넉넉하게 10개 정도 정했다. 여러 번 고치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 끝에 하나의 8행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디자인 콘셉트를 잡아 꾸미고, 사진까지 넣어주면 작품이 완성됐다.


이름! 조금만 신경쓰면 상대방도 기분 좋아지고
나역시 즐거워지는 삶의 열쇠다!
_김이율《익숙해지지 마라. 행복이 멀어진다》(지식너머)


이름 (2).jpg 간호부팀장님 사진을 지브리 에니메이션으로 변환^^


이렇게 완성된 작품을 아침 일찍 깜짝 선물했더니, 나도 그녀도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 상대방의 이름과 직책을 부르는 문화는 아직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내 이름이 불린다면 평소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정을 만날 수 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서로가 기분 좋아지고 즐거운 느낌을 나눌 수 있다.


○○ 병원장님?

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무리다.

ㅋㅋㅋㅋㅋ


내이름은 동하다

마음이 동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