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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 156화 - 말없이 땅을 지키는 [그]루터기

잘려나간 자리엔 오래전 푸르던 계절들이 스며 있었고,

by 마음이 동하다

근무하는 토요일은 평소보다 더 아침 일찍이 눈이 떠진다. 토요일엔 차도 안 막히는데도 말이다. 직장에 도착에 뜨끈한 순두부국 한 그릇으로 끼니를 채우고, 잠시 책상 정리 후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밤새 폭풍과 같은 바람이 불었는지 거리엔 떨어진 나뭇잎사귀의 잔재들이 구석에 모여 있었고, 빗물이 떨어진 자리들은 투명하게 깨끗했다.


늘 지나가던 길인데 모처럼 그루터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최근 6개월간 내 눈에 띄지 않았다는 건 아마도 최근에 울창함을 뒤로한 채 그루터기 신세가 되었던 것일까?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마음이 짠했다. 지나가는 곳에 있으면 누군가의 쉼터라도 될 터인데 잔디 가운데 있어서 그 신세가 더욱 처량해 보였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특정 상록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그루터기는 다시 자란다는 말이 있던데.

부디 다시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진 한 장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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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숨결은 아직 윽하다
남겨진 자리 기억처럼 리워서

피지 못한 꿈 이내 접고 만두다

시간은 조각나 흔들리고 때그때

햇살은 머뭇대다 스쳐가고 럭저럭

누구의 발길도 이끌지 못해 릇되다

소망 하나 움트길 바랄 뿐 야말로

말없이 땅을 지키는 루터기




장마가 머뭇대는 아침, 잠시 비가 그친 틈에 바라본 그루터기 위로 물기 어린 숨결이 감돌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무언가를 간직한 듯 조용히 웅크린 모습은 여전히 그윽하다. 잘려나간 자리엔 오래전 푸르던 계절들이 스며 있었고, 그때의 푸른 나뭇잎과 바람이 문득 떠올라 더욱 그리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가지를 뻗던 시간은 이미 멈춰 있었고, 새로운 시작도 시도하지 못한 채 어느새 그만두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고요했다. 시간은 그루터기를 두고 제멋대로 흔들렸고, 매 순간은 의미를 찾기 힘들 만큼 그때그때 흘러갔다.


비가 갠 틈에 스쳐가는 햇살도 이내 돌아서고, 그 위엔 생명의 기운도 머물지 않아 그냥 그런 하루로만 흘러갔던 듯 그럭저럭이었다. 누군가 다가올 것 같다가도 이내 멀어지고, 다시 살아날 기회마저도 이제는 그릇되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루터기는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언젠가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그야말로 단단히 새겨져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품은 채, 아무 말 없이 남아 있는 그루터기는 지금도 땅 위에 조용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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