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목소리와 소수의 고집 사이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툴 때, 대개 자기는 옳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입장이 옳다고 믿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자신과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이 소수인 경우에도, 누구나 자기가 그 ‘옳은 소수’, ‘특별한 도덕적 판단력을 가진 소수’에 속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_도스토옙스키《죄와벌》(삼성출판사)
평일 저녁, 동래역 4번 출구에서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계모임이다. 남자들만 8명이지만 1차는 50분이면 끝난다. 술 좋아하는 나도 이 모임에서는 술 안 먹는다. 2차 커피숍에서 1시간을 넘긴다. 잠시 직장 얘기를 나누다가 금세 정치와 사회 이야기로 옮겨갔다.
“정치인들은 다 똑같아. 결국 자기 이익만 챙기잖아.”
“아니야, 그래도 조금씩 바뀌고 있어. 우리가 더 참여해야지.”
“글쎄, 나는 그런 거 다 부질없다고 봐. 세상은 원래 그렇게 흘러가게 돼 있어.”
말이 오갈수록 친구들의 표정은 점점 단단해지고, 목소리는 커졌다. 나는 조용히 바닐라라떼를 홀짝이며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흥미로운 건,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확신에 차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각자가 ‘옳은 소수’에 속해 있다는 듯, 자신이야말로 다수의 착각을 넘어선 특별한 시각을 지녔다고 믿는 눈빛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내가 허용한 제한적인 경험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_이랑주《살아남은 것들의 비밀》(샘터)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란, 어쩌면 그들이 허용한 제한적인 경험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나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각자 자신이 본 세상과 들은 이야기, 마음속에 쌓아둔 경험의 틀 안에서만 옳고 그름을 가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아이러니하다. 근거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반복하면, 어느 순간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를 두고 옛사람들은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했다. 세 사람이 입을 모으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이다. 다수가 힘을 합치면 진실 아닌 것도 진실이 되고, 소수는 설 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정작 그 다수 속에서도, 사람들은 또 자기 자신이 ‘옳은 소수’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다투고, 또 자기 확신에 머무른다.
방총(龐蔥)과 태자가 한단(邯鄲)에 인질로 잡혀 가며 위나라 왕에게 말했다. “지금 한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라고 말하면, 왕께선 믿으시겠습니까?” 왕은 “아니네.”라고 대답했다. (방총이 말했다.) “두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라고 말하면, 왕께선 믿으시겠습니까?” 왕은 "과인은 의심할 걸세."라고 대답했다. (방총이 말했다.) "세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있다.’라고 말하면, 왕께선 믿으시겠습니까?” 왕은 "과인은 믿을 것이네."라고 대답했다. 방총이 말했다. "대저 시장엔 호랑이가 없는 게 분명할 것이나, 그러한데도 세 사람의 말이 호랑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 한단과 대량의 거리는 시장보다 멀고, 신(臣)을 비방하는 자는 세 사람을 넘을 것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이를 살펴주십시오.” 왕은 말했다. “과인은 진정 안다고 생각한다네.” 이렇게 말을 하고 떠났으나, 참언(讒言)[3]이 먼저 영향을 미쳤다. 훗날 태자는 인질에서 풀려났지만, (방총은) 끝내 (왕을) 뵐 수 없었다.
_출처《나무위키》
이런 풍경은 직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회의 자리에서 프로젝트 방향을 두고 의견이 갈릴 때, 모두 자기 입장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누군가의 말은 반복되며 힘을 얻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홀로 고집스러운 소수로 남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정답은 늘 한쪽에만 있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섞이고 다듬어지면서, 혼자였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길이 열리곤 했다.
아마 중요한 건 누가 옳은가를 가리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마음을 잠시 품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내가 아는 세계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겸손함, 그 작은 여유가 진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게 아닐까.
곗날을 마치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창밖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도로 위 가로등 불빛이 길게 이어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가는 길,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내가 옳은 소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품어야겠다고.
어쩌면 그 작은 인정에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가 조금 더 따뜻하게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야말로
리가 끝내 찾아야 할 진짜 ‘옳음’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