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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ㅅㅇ Sep 29. 2020

프리드리히 니체

책 리뷰

어릴 적에 난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인 아이였다. 스스로 난독증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독서는 쉽지 않았고, 차라리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푸는 것이 더 집중이 잘되고 좋았다. 특히, 인문학이나 철학은 너무나 어려운 주제였지만, 용돈만 생기면 서점에 가서 철학책을 구입해오는 여동생과 철학과 출신의 어머니의 대화 속에서 은연중에 호기심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 융 등의 심리학, 정신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인문학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듯하다.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점점 더 넓은 시야를 필요로 하게 되고, 정답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왜(why) 사는가”, “우리는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궁금해진다.


혹시 니체에 관심이 있냐며 우연히 선물 받았던 이 책을 1년 만에 펼쳐보았는데,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그동안 책장에 꽂혀있는 분홍색 책 표지만 덩그러니 쳐다보던 내가 부끄럽기도 했고, 예상과 달리 책 내용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니체의 발자취를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기록했기 때문인지, 독자로 하여금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스위스
바젤 -> 트립센 (리하르트 바그너) ->
질스마리아 (오늘날의 니체 하우스) ->
질바플라나의 수를레이 바위
(영원회귀 사상의 단초)

*프랑스
에즈의 쉬르 메르 오솔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집필 중)

*이탈리아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탈고)
토리노 (채찍질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다가 발작 증상, 이후 정신적 암흑을 맞이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때 즈음부터 그의 철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

*독일
뢰켄 (니체의 고향, 생가와 묘지)


저자인 이진우 교수는 아우크스부르크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이후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에 이어 총장을 역임했다. 이후에도 제9대 한국 니체학회 회장을 지낸 만큼 책을 읽으면서도 니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26세에 스위스 바젤대학 최연소 문헌학과 교수가 되지만, 안정된 직장을 10년 만에 그만두고 격렬하게 방황하기 시작한다. 학문적 성취에 대한 강박과 건강악화로 휴식기에 들어갔지만,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를 추종하며 스스로에 대한 성찰은 깊어진다. 그렇게 10년 가까이 그는 실존과 사유를 찾아 겨울에는 산을, 여름에는 바다를 찾아다녔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작품 속에는 철학적 개념이 담겨있다.


초인, 권력에의 의지
낙타, 사자, 어린아이
허무주의, 데카당스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특히, 니체의 사상은 생소한 사색적 서술방식과 다양한 주제들로 인해 여러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20세기 파시즘과 나치즘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왜곡과 과장으로 인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이진우 교수의 발걸음과 언어를 통해 추상적으로 느껴지던 니체의 철학적 개념들이 내 경험과 맞물리며 조금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듯하다.

 

니체는 초인이 되려면 자신에게서 혐오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초윤리적인 인간의 의지도, 절망에 빠지고 짓눌려버린 스스로에 대한 실존적 고민 없이는 결코 획득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기 마련인데,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더욱 많은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자연은 니체에게 중요한 성찰의 대상이었는데, 고독과 함께하는 산과 바다는 나에게도 비슷한 의미로 다가온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등산과 물놀이도 즐겁지만,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고독의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을 더 풍요롭게 채워준다. 여행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도 창밖의 자연을 감상하고 사색하는 시간은 소중하다. 혹 누군가 왜 이렇게 무표정이냐며, 우울하냐며, 또 생각에 잠겼냐며 궁금해한다면 나는 그저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것이다.


웃지 않는다고 우울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혼자 만의 시간은 필요하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전통적인 도덕과 기독교적 윤리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디오니소스는 황홀경, 도취와 쾌락의 신으로 불리는데, 니체는 절제와 중용이 아닌 반이성적인 열정과 충동을 새로운 덕목으로 제시한다. 나아가 이성과 지혜를 상징하는 신,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함께 제시하며 질서와 혼돈의 결합을 이야기한다.


정해진 틀과 도덕적 기준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내가 사실은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쫓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늘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살고 싶다는 열망 속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어느 순간 나를 막아서는 superego와 충돌하기도 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그동안 어떠한 가치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겠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어려움 등에 굴복하거나 체념하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니체는 그것마저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방식의 삶의 태도를 강조했다.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삶을 긍정하며,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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