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게는 단지 "영혼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뿐
어느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깊은 절망감으로 우울증에 걸리더니 하지 마비 증세까지 겪게 된 한 의사가 있었다. 삶의 의욕을 모두 잃은 그는 틈만 나면 자살을 하려고 했다. 그런 이유로 가족들은 24시간 그를 돌봐줄 간호사를 고용하게 된다. 어느 여름날 그와 간호사는 바다로 산책을 나가게 되었는데 의사는 간호사에게 바다 바람을 쐬기 좋은 바위 쪽으로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하며 그녀에게 잠시 쉬며 수영을 즐기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녀가 수영을 하는 사이에 휠체어를 밀어 바다로 떨어질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막 휠체어와 함께 자신을 떨어뜨리려고 하는데 바위 아래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수영을 하던 간호사가 위험에 빠진 것이다. 의사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간호사를 구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일어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끌고 모래사장까지 헤엄쳐 나왔다. 그때 의사는 우울증과 마비증세에서 벗어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을 살리는 일이 결국 자신을 살리는 일이다.
나는 내담자로 반평생을 살아왔다. 만성적인 우울감으로 중학교 때 즈음부터 상담센터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이후로도 줄곧 스스로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될 때면 명상센터며 점집이며 상담센터를 전전하며 없는 돈을 써댔다. 결국에는 신경정신과 약까지 복용해보기도 하며 지금껏 근근이 생을 연명해왔다. 결국 내가 경험해 왔던 지극히 보통의 우울감, 절망감, 무력감, 죄책감, 그런 아픔들을 기반으로 펼쳐져 왔을 일상과 이를 기반으로 또 앞으로 펼쳐져 갈 내 삶에 대한 맥락에 대해 가닥이 잡히기 시작했던 글이다.
뭐 그렇게 나름은 거창한 이유로 나는 또 돈이 되지 않는 분야 중 하나인 미술치료 수업을 듣기 시작한다. 상담활동은 혹은 심리치료는 인간의 심리적 고통과 불행을 완화하고 나아가서 심리적 성장을 촉진하는 활동이다. 그동안 상담치료를 받으면서도 사실 근본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아 답답함을 많이 느껴왔는데, 상담에 대해 배우면서 어쩌면 그 시기에 그 고통들이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지나왔던 것이 아닐까 하는 긍정적인 해석을 염두해두게 되었다. 더불어 그간 치료효과라는 것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았던 것은 어떤 이유였을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도 될 것 같고, 만약 운이 좋아 내담자의 역할이 아닌 치료자의 역할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어야 할까, 혹은 어떤 이론들과 인연이 되어 진지하게 공부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까 하는 생각들이 오갔다.
현대 심리치료의 발전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정리하는 수업에서는 그동안 이 책, 저 책 읽으면서 파편화되어 있던 부분들이 가닥이 좀 잡히는 것 같아 좋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시작, 무의식을 중심으로 한 정신역동적 치료 이후 행동치료, 인간 중심 치료, 그리고 인지심리학의 발전과 함께 인지행동치료까지의 전반적인 흐름은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이해해가고 있는지 인간 의식의 발달과정을 흘깃이라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양육의 주목적은 자립이라고 한다. 치료자와 내담자의 상호작용도 결국은 내담자를 자립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자립하기 위해서는 치료자와 내담자의 관계가 일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담자의 자립성을 키워주기 위해 제3의 손이 원활하게 되는 치료자까지는 아니어도, 예술과 미술치료적인 베이스를 바탕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을 기획하여 어느 정도는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그런 퍼실리테이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써놓고 보니 같은 말이다.) 세상의 그 어떤 이론도 나에게는 먹히지 않을 거라는 내게 천천히 스스로를 다시 다독이며 이해시켜 이제는 나도 자립을 할 수 있을까, 또 스스로 일어 서기만 할 것이 아니라 뚜벅뚜벅 여행하며 만나게 되는 누군가들을 때로는 일으켜 세워주기도 하고, 응원을 해주기도 하며 필요한 무언가를 나누어줄 수 있는 기회까지 잡을 수도 있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한다.
모성애는 어린아이에게 살려고 하는 소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준다. 이러한 사랑은 성서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약속된 땅(땅은 언제나 어머니의 상징이다)은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있다는 행복감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젖’을 줄 수 있으나 ‘꿀’까지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꿀을 줄 수 있으려면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일 뿐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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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린아이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아이는 결국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어린아이의 성장을 돌봐주는 것이며 이것은 그녀로부터 어린아이가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양육에 대해서, 또 여성의 삶,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 고민할 때 만났던 에리히 프롬의 글이다. 삶에 대한 사랑을 천천히 길러주는 것. 그 외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현재까지 내가 이해한 미술치료에는 크게 두 가지 축이 있다. 간단하게 나움버그식과 크레이머식으로 분류한다. 마가렛 나움버그가 미술을 언어로 하는 임상심리상담 시에 미술을 도구로 사용 하기 시작하면서 미술치료라는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움버그의 입장은 상담치료가 주가 된다. Art in Therapy(치료에서의 미술) 그래서 보통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을 발견하는 테스트 형식의 매체로 그림이 사용된다. 이와는 좀 다르게 이디스 크레이머는 Art as Therapy(치료로써의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미술작업 자체에서 몰입과 승화가 일어나며 치료과정이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즉 내담자 본인이 스스로 통합하고 승화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독려하고 있다. 요즘에는 미술치료과정도 많아지면서 퀄리티가 사실 천차만별인 상황인데, 어떤 시기에 어떤 방식을 만나든 자신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예술작업을 치유의 과정으로 썼던 예술가들도 있고, 한편 삶 자체가 난장판이거나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예술가들도 많고... 예술분야건 예술교육분야건 예술치료 분야건 실제로 경제적으로 잘 활용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극히 일부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각 개인의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어쩐지 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들이 있긴 하지만,
예술가로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가장 잘 표현해주는 은유는 ‘도피처’이다. 내가 혼자 들어가 세계와 그것의 복잡함 들을 처리하고 정리할 수 있는 내 머릿속의 도피처. 그것은 내 내면의 오두막이고, 나는 그 안에서 기꺼이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정신분석가 스티븐 그로스 Stephen Grosz가 쓴 글에는 프랑스에 있는 집을 새롭게 꾸미는 일에 대해 늘 이야기하는 환자가 나온다. 이 환자는 앞으로 그 집을 어떻게 장식하고 가구를 어떻게 새로 배치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이 주택 개조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몰입감과 기쁨을 안겨 주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삶이 너무 힘겨워질 때마다 머릿속으로 주택개조에 관한 생각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프랑스에 있는 집에 관한 멋진 계획을 짜는 것이 그에게는 긴장을 풀어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신치료 과정이 마무리되어 상담실을 막 나가려던 그가 돌아보며 말한다. “알고 계시죠, 그로스 선생님, 프랑스에 집 같은 건 없다는 거. 알고 계셨을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그가 한 말이 내 안에서 공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가 찾아가는 그 장소, 그곳이 바로 그가 예술가가 되는 도피처였다.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그레이슨 페리, 2020, p.182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는데, 어른 아이이건, 어른이건 우리에게는 상상과 망상과 공상을 자유롭게 하면서 놀거나 숨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예술이 제공하는 것은 공간,
영혼이 숨을 쉴 수 있는 여유 공간
존 업다이크
사족: 치료라는 말이 들어가면 나는 ‘환자’가 된다. 그래서 미술치료라는 말을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치유로서의 미술? 힐링 아트? 이런 단어들도 너무 진부하게만 느껴진다. 그저 우리 모두에게는 영혼이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때때로 필요할 뿐이다.
[feat. 알프레드 칸터 Alfred Kantor(1923~2003)]
나치 수용소에서 계속 스케치를 했던 알프레드 칸터 Alfred Kantor(1923~2003).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린 그림을 바로 친구에게 전해주거나, 그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은 다른 수용소에서는 그리자마자 그냥 없애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죽음의 수용소를 쓴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도 수용소 내에서 사람과 상황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 경험들을 바탕으로 로고 세러피(심리치료기법)라는 독자적인 기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알프레드 칸터 역시 수용소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살아 남아 드로잉북을 출간하긴 하는데(2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지금도 구하기는 어려운 책이다. 이렇듯 미술의 치유적인 기능을 이야기할 때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볼 수 있다는 점이 있는데, 어마어마하게 두려운 상황이나 엄청나게 들끓는 감정들도 작은 화면 속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나면 때로는 ‘별게 아니었군. 내가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또 반대로 마음에만 품고 있던 좋은 것들은 꺼내고 나면 오히려 더 소중해지거나 뿌듯해지기도 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