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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마음의 돌멩이

꿈이 이루어지는 길2

by 폴 클루니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순간,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


- Paul Cluny -


산티아고길 25일차


폰세바돈에서 폰페라다까지, 27km 구간이다.

오늘로 25일차, 564km를 걸어왔다.
아침 일찍, 여명이 뜨기 전 '철의 십자가'를 향해 길을 나섰다.
높은 언덕 위에서 바라본 새벽빛은 어둠을 밀어내며 번져왔고,

그 빛은 내 마음에 작은 용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높은 산 길 위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채우는 순간,

그 공간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졌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걷다가 뒤를 바라보니, 하늘 위로 비행기 한 대가 대각선으로 활주하고 있었다.

어디론 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흔적을 보고 있으니 지금까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뚜렷한 목표 없이 열심히만 걸어온 내 인생길과는 다른 듯해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묵묵히 조용한 산길을 걷다 보니 멀리 철의 십자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그리운 친구를 보는 듯 반가웠다.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묘하게 뭉클해졌다. 수많은 순례자들의 눈물과 기도가 쌓인 자리라 그런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울림이 밀려왔다. 도착해서 나는 서울에서 가져온 작은 돌멩이를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냈다. 그리고는 여러 사연을 담고 있는 돌무덤 사이에 올려놓았다.

이혼의 아픔, 수능을 준비하는 고3 딸을 두고 떠나온 미안한 마음, 혼자 지내며 느낀 외로움...


나를 힘들게 하는 마음을 돌에 담아 십자가 아래 내려놓았다. 주변에 무수히 쌓인 돌과 물건들을 보며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을까? 그런 사연과 마음들이 모여 거대한 탑이 되었겠구나.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들, 지금 이곳에 함께 있는 이들, 그리고 조금 전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내가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를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돌을 내려놓고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막상 십자가 앞을 떠나려는 데 정든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머뭇 거리다 출발했지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끝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다시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이어진 내리막 길은 거친 돌길이라 무릎이 시큰거려 스틱에 의지하며 바닥에 집중을 하며 힘들게 내려와야 했다.

긴 내리막 끝에 무릎이 아파서 통증이 심해져 걷기가 힘들 때쯤 되니 탬플 기사단의 성으로 유명한 폰페라다에 닿았다. 걷기 전 내 마음을 짓누르던 근심을 '철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오니 남은 길은 더 가볍게, 더 행복하게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언젠가 이곳에 와서 각자의 무거운 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그들의 인생 길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철의 십자가'를 지나온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길을 어떤 마음으로 걸어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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